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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23. 2021

명랑한 이방인은 걷는다

독일의 사계절 산책


봄은 절대 쉽게 오지 않는다. ‘춘래불사춘’이라더니 요 며칠 눈이 왔고 난생 처음 보는 주먹 만한 크기의 우박이 세차게 떨어지며 세기말 분위기를 연출했다. 연신 ‘봄은 언제 오려나.’를 중얼거렸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날 하늘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봄이 오려나보다. 3월 초의 빗물에서는 묘하게 달큰한 향내가 난다. 봄이 오는 냄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아득한 어딘가에서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끝의 후각은 그 달콤함을 못 이겨내겠다는 듯 발걸음을 재촉한다.



공원에 나갔더니 여기저기서 킁킁 봄내음을 맡고 나온 사람들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꽃을 피운 것일까?’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뚫고 개나리가 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기지개를 피며 땅을 뚫고 올라 오르는 새싹처럼 어떤 노란 희망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공원이 알록달록 천연 색들로 물들어 간다.


독일도 한국과 비슷하게 제일 먼저 목련과 개나리가 핀다. 이내 벚꽃이 팝콘 마냥 곳곳에 터질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자연의 생애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보낸다. 변함없는 계절의 순환은 이방인에게 묘한 위로를 준다. 이억 만리 떨어져 있지만 고국과 같은 주기로 살고 있다는 기분. 한국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계절, 같은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위무가 될 수 없다. 꽃을 가만히 바라본다. 보고 싶은 가족들, 친구들의 얼굴을 본다.


때로 봄날의 산책은 신이난다. 꽃들이 만발한 꽃밭을 돌다가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집을 발견했고, 코끼리  모양을  귀여운 미끄럼틀도 만났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천진난만한 척을 하며 미끄럼틀을  보고 싶었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좁디좁은 코끼리 코에  엉덩이가 끼이는 불상사를 연출하고 싶진 않아서 살짝 다리만 걸쳐 본다. 봄의 단상들은 간지럽다. 봄을 맡았고 도취되었고 빠져버렸다. 하마터면 봄과 볼이 맞닿아 키스를   했다.(  그랬나.)


가끔은 불한당처럼 찾아온 강력한 돌개바람이 온몸을 감쌀 때도 있다. 그럴  바람을 맞서는 것도 방법이다. 호기롭게 달려보기로 한다. 나이를 잊은  달리다 후들거리는 다리 탓에 하루 종일 허공에 헛발질을 하기 일쑤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없다.

봄은 다시   힘껏 삶을 달려보고 싶게 만든다. 삶을 뜨겁게 사랑해 보고 싶게 만든다.

봄은  새봄이니까….  것은 아끼고 싶으니까….


사람들은
봄이라서 행복하고
봄이라서 설레고
봄이라서 사랑한다.
봄에는 모든 이유가 다 봄이 된다.




아인스- 쯔바이!(Eins-Zwei)” 아이들은 일제히 같은 동작으로 -둘을 외치며 노를 젓는다.

여름의 신호탄이다. 여름 산책의 중요한 일과는 일명 카멍(카약보며 멍때리기)이다. 이엉차 이엉차 고사리 같은 손으로 카누를 타는 아이들은 잔망스럽기 그지없다.  옆을 유유히 지나가는 성인 카누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호젓하다. 가만히 바라만 봐도 시간 가는  모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크고 작은 카누들이 흘러가는 강가를 지나 분수대 앞으로 가면 물 한줄기에 신이 나서 뛰어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물에 흠뻑 젖어도 상관없다. 신나게 노는 게 너희들의 일인걸. 부모들은 그런 아들, 딸들을 지긋이 바라보며 잔디에 누워 한가로이 일광욕을 한다. 주변을 배회하던 나도 덩달아 풀밭에 털썩 앉아 본다. 눈을 감는다. 내려쬐는 햇살을 머금는다. 먼지는 쏙 빠지고 마음은 뽀송해진다. 이 작열하는 태양을 어디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돈을 주고 살 수만 있다면 얼마가 되었든 사고 싶다. 간직하고 있다가 사용하고 싶을 때 꺼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렁인다. 햇빛이 귀한 이곳에서 기미 걱정은 오히려 사치다. 우리가 여름에 해야 할 일은 틈이 나는 대로 햇볕을 모으는 것이다. 차곡차곡 잘 쌓아놓아야 한다. 그래야 지난한 겨울을 어떻게 해서든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천천히 흘러가는 카약만큼이나 이 계절이 천천히 흘러갔으면 싶다.




한 낮에 내려쬐는 해는 때로 뜨겁고, 해질녘 기습하는 비는 때로 차갑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주인공이 되겠다고 다투는 시기다. 더웠다, 선선했다, 계절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옹다옹하며 선두를 달리지만 나는 늘 여름을 응원했다. 가을이 온다는 것은 손끝 시린 겨울도 성큼 다가왔다는 증거니까.



한국의 절기 비슷하게 독일에서도  시기를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8월말을 ‘알트 바이어 좀머(Altweibersommer)’라고 부르는데 해석하면 ‘초가을의 따스한 날씨’ 정도 된다. 이 단어의 어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초가을에 거미줄이 자주 생긴다는 자연 현상에 의거해, Alt-(오래된) Weiber-weben(직조하다) 또는 Spinnweben(거미줄), Sommer-(여름)이라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인데, 그보다는 나이든 여성에게 찾아오는 회춘처럼 아름다운, 그러나 짧게 찾아오는 날씨. Alt(나이든), Weiber(여인들), Sommer(여름)라는 뜻이 좀 더 마음에 든다.




툭툭-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화양연화를 꿈꾸는 중년 여인의 단잠을 깨운다. 결국 가을이 이겼다. 자연의 이치는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고 쓰담쓰담 만져본다.  작은 알맹이가 거대한 상수리나무를 품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새삼 대견하다. 바람에 흔들리고 땅에 나뒹굴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 모두는 안다. 당신의 마음에도   번도 성장을 미룬 적이 없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고,  작은 도토리가 툭툭- 소리를 내며 일깨워준다.


초록으로 무성했던 이파리들이 아주 천천히 노란빛으로 변해간다. 숲은 녹음에서 황금으로 자신만의 속도로 성숙해 나간다. 수채화 붓으로 툭툭 터치한 듯한 나뭇잎들의 조화가 “가을이야” 라고 말한다.


소슬바람이 분다. 소소하고 슬슬한 일렁임에 고색창연한 개암나무들이 휘청거린다. 들어왔다 나가는 바람결에 잎들이 부서져 내린다. 허공을 나뒹구는 황금빛의 이파리에 둘러싸여 잠시 황홀감에 젖는다. 마콘도 사람들이 보았다던 ‘작고 노란 꽃들이 하늘에서 가볍게 빗발처럼 흩날리는(백년 동안의 고독_G.G마르케스)’ 모습은 바로 이런 광경이 아니었을까. 짐승들이 꽃에 덮여 질식했다면 나는 잎에 덮여 허우적거렸다. 꽃이든 잎이든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 카뮈가 그랬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고.


윙윙-위이잉-풀 깎는 소리가 들린다. 흙과 풀이 쇳날에 단절되며 구수하면서 씁쓸한 냄새가 난다. 사람들이 나와 풀을 베어 낸다는 건 겨울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앙칼진 바람 소리가 귓가를 할퀸다. 늘 가을은 조용히 가고 겨울은 요란스럽게 온다. 잔인한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서머 타임이 종료되고 한국과의 시차가 7시간에서 8시간으로 벌어졌다. 1시간 더 시간차가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거리도 멀어진 것만 같아 못내 서글프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맹렬한 추위의 기세는 식을 줄 모른다.




독일의 겨울이 매섭다는 것은 너무 자주 말해서 쓰디쓴 계절의 분위기와 달리 입에서 단내가  정도다. 울창한 나무와 화려한 꽃들로 찬란했던 공원은 피서객들이 모두 떠나고  병과 쓰레기만이 흩날리는 폐장한 해수욕장을 닮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와 횡횡한 바람이 갈비뼈 사이를 후벼 판다. 안으로 안으로 자꾸 움츠려든다. 매서운 날씨는 외출을 주춤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몸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은 ‘이다. 원래 독일은 눈이  오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데 내가 사는 동안은 이상기후 현상이라고 우려할 만큼 눈이 자주 왔다. 환경을 생각하면 걱정을 해야 마땅하겠으나 겨울이 혹독했던 내게  눈은 하늘에서 주는 설탕같은 선물이었다.



뽀도독 뽀도독 눈 밟는 소리가 잔망스럽다. 사람들의 발길은 모두 한 곳으로 향한다. 우리의 목적지는 공원 중간 즈음에 자리한 이름 없는 작은 언덕이다. 때 아닌 폭설이 야트막한 동산을 눈썰매장으로 변신 시켰다. 한국의 유명 스키장들과 비교하면 볼품없는 말 그대로 그냥 언덕일 뿐인데 너도나도 신이 나서 씽씽 썰매를 탄다. 설원 위에서 순도 100%의 동심을 읽는다. 사람들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나무로 만든 아날로그 냄새 폴폴 풍기는 동일한 디자인의 썰매에 몸을 의지해 신나게 눈 위를 달린다. 은하수가 지구에 펑펑 쏟아졌던 날. 영하 19도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 포근했다.




공원은 한 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매 계절 분주했다. 봄에는 사람들이 지천에 핀 명이 나물을 따러 다녔고 가을엔 아이들이 뒹굴뒹굴 굴러다니는 도토리와 마로니에 열매 수집에 열성이었다. 가끔 한량처럼 보이는 노인들이 한가로이 낚시를 하기도 했다. 그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들꽃은 고개를 아주 낮게 숙여야 자세히 볼 수 있다. 사람이 다가가면 새들이 날아가는 이유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의 초록은 시간에 따라 색깔이 변모한다. 5월의 초록빛은 가녀리고 연하다. 그래서 연두색이다. 7월의 빛깔은 좀 더 짙고 무성하다. 청록색이다. 그 빛깔들은 새벽비가 내린 뒤에 가장 곱다. 인적 드문 이른 아침, 홀로 그 영롱한 형형색들을 눈에 담다 보면 어느새 내가 보였다.



규칙적인 산책을 통해 가장 자주 조우한 것은 다름 아닌 꾸미지 않은 말간  모습이었다. 공원  바퀴를 휘젓고 나면 휘몰아치는 번민이 가라앉았고, 하릴없는  어슬렁거리다 보면  가지 수줍은 글감이 떠오르기도 했으며, 어여쁜 꽃들에 심장이 요동칠 때면 아직은  뛰고 있는 가슴에 감사했다. 무엇보다 양쪽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하늘  ,   , 나무  ,    바라보며 걷고 있는 내가 좋았다. 봄의 역동하는 기운을 느꼈고, 여름의 찬란한 태양을 모았고, 가을의 낭만을 담았으며, 겨울의 한파를 꼿꼿함으로 끌어 안았다.


산책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쉴 새 없이 매혹했다. 1년 365일 공원을 산책하며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을 느꼈지만, 꼭 한 계절을 꼽으라면 봄날이 가장 그리울 것이다. 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겨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엄동설한을 뚫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어서다. 대견해서 손바닥이 빨갛게 되도록 세차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꼬옥-안아주고 싶다. ‘봄’.

오늘도 명랑한 이방인은 걷는다.




올해 리필된 봄은 
분명  눈부실 것이라 예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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