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통일 기념일’을 염원하며
‘Where are you from?"
여행이든, 거주이든 외국에 나오게 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것이다. 여기서 한국인에게는 늘 추가 질문이 따라붙는다. “North Korea? South Korea?" 지겹도록 들은 이 말. 북한 사람들의 여행이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왜 궁금해 할까?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으나 참으로 일관되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받은 질문이다.
한번은 이 레퍼토리가 지겨웠던 남편이 장난삼아 “나 북한에서 왔는데?” 라고 되받아 친 적이 있다. 상대는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더니, 박수를 위아래로 치는 김정은 특유의 제스쳐를 취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입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씁쓸했다. 분단의 상황이 희화화 된 것 같았달까. 타국에서 만난 내 나라는 고국에 살 때보다 때로는 더 뜨겁고 때로는 더 차갑게 다가왔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은 당연히 늘 차가운 쪽이었다. 물론 삼성,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활약, 오징어 게임, BTS 등으로 인한 문화 강국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도 커졌지만 여전히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하면 북한과 전쟁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나는 우연치 않게 북한을 가 본 적이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은 금강산 관광을 비롯해 남북 교류가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호기심에 대학생 남북교류사업에 지원 했는데 운 좋게 합격이 되면서 4박 5일간 북한을 여행할 수 있었다. 간혹 독일에서 친해진 사람들에게 그 경험을 안주 삼아 그들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도 했다. 당시 찍었던 사진을 몇 장 보여주기도 했고, 북한에서 금기시 되는 행동들-가령 어떤 풍경이나 사람을 가리킬 때 검지손가락으로 ‘저기 봐!’를 하면 안 되는데, 이는 지도자 동지 모욕죄에 해당된다.-을 알려 주면 그들은 내가 무슨 통일 투사라도 된 것 마냥 반짝 반짝 빛나는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통일과 북한은 독일인과 대화를 하게 되면 한 번쯤은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주제다.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기에 남북 상황에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뼈아픈 분단을 경험한 그들은 한국의 상황을 궁금해 한다. 더욱이 내가 살았던 라이프치히는 구동독의 중심지이자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된 지역이기에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 (이런 이유로 ‘라이프치히’와 5‧18 민주화의 도시 ‘광주’는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다만 통일이란 것은 참으로 복잡 미묘한 것들이 얽히고설키어 있어서 독일역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는 오래지만 그들 사이의 마음의 벽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굳이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북한 격이라 할 수 있는 동독 사람들은 같은 나라 안에서도 ‘2등 시민’으로 차별 받는다고 생각한다. 학교 때문에 서독에서 동독으로 온 친구 C의 어깨에는 은근히 서독 특히 남부에서 왔다는 자부심이 베여있었다. 늘씬한 키에 금발머리, 미국 어학연수를 다녀온 덕에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유행에 민감했고 세련된 이미지를 폴폴 풍겼다. 오가닉 패션이 즐비한 동독 사람들과는 달랐달까. 그러고 보니 내 옷을에 대해 예쁘다며 관심을 보인 유일한 사람도 서독 출신의 그녀였다. 동독 사람들은 마음이 차갑다는 둥 서울에 살다 온 너에게 이 시골이 얼마나 갑갑하겠냐는 둥 연민까지 보냈다.
외국인인 내 눈에도 동독은 촌스럽고 가난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가치관, 교육수준, 소득, 집세 및 생활물가 등 많은 부분에서 서독과 동독은 여전히 차이가 난다. 같은 이유로 학생들은 동독대학을 졸업해도 서독에서 일하기를 희망한다. 나야 남편의 학교 때문에 지역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거주지를 고를 수 있다면 외국인이 살기엔 개방적이고 영어가 상대적으로 잘 통하는 서독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물론 집세 및 생활물가는 동독이 월등히 저렴하기 때문에 판단은 본인의 몫.
이렇듯 통일 후 여러 사회적 갈등과 문제점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됨을 후회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못 봤다. 과거 분단 체제 속에서도 우리와 달리 동독과 서독은 편지와 소포를 허용했다. 1968~1988년 서독에서 동독으로 18억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22억통의 편지가 발송됐다고 한다. 어쩌면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린 것은 가족, 친구들 사이에 오고 간 수많은 편지가 아닐까 싶었다. 그 염원이 모여 일구어 낸 통일은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라고 자부할 만 했다.
실제 독일에서 보낸 숱한 기념일 중 유일하게 부러운 날은 ‘10월 3일 통일기념일’이었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이 국경일을 보낸 많은 한국인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인 사회에서 기획한 정기 연주회는 그 증거일 것이다. 라이프치히는 독일 통일의 분수령인 동시에 바흐, 바그너, 멘델스존 등 엄청난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도시이다. 이 두 가지 공통분모가 만나 이곳에선 매년 가을이면 ‘통일 희망 한인 음악회’를 연다.
나는 서독에서 온 C를 데리고 한국의 문화도 보여줄 겸 음악회에 참석했다. 그녀에게 한국의 여러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통일 염원 연극과 무용, 음악이 이어졌는데, 이날 제일 마음을 이끈 것은 차세대 유망주의 슈베르트 가곡도 기교 넘치는 피아노 연주도 아닌 ‘고향의 봄’ 이었다. 참 희한하게도 외국에서 듣는 ‘아리랑’과 ‘고향의 봄’은 심장을 아릿하게 만든다. 까닭은 모르겠지만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조국을 향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른다. 무대에 오른 참가자 전원이 나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데, 맨 앞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계시던 한국 할머니 세 분께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시고 노래를 따라 부르셨다. 저 어르신들은 어떤 여유로 이 먼 땅까지 오셨을까. 파독 간호사이셨을까. 눈을 감고 부르면 저 멀리 고향으로 나를 데려다 줄까.,, 그 분들의 목소리에는 애환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함께 움직이는 어깨와 새하얀 머리, 구슬프게 읊조리는 ‘고향의 봄’은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날 우리 모두는 판문점의 봄이 평양의 가을로 이어지길 소망했다. 공연이 끝나고 헤어지는 길에 C가 나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잊어지지가 않는다.
“이야 한국인들 정말 대단하다.
독일에서 이런 음악회를 열다니 말야.
한국도 꼭 독일처럼 통일 기념일이 생기길 기도할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적 드문 정류장에 앉아 트램을 기다리던 중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가 손가락을 창문에 대고 스윽스윽 무언가를 쓰더니(사랑한다고 썼을까.) 연신 손을 흔든다. 여자역시 수줍은 미소를 띄우며 손짓에 화답한다.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은 늦가을 차가운 공기를 밀도 높은 로맨틱 현장으로 바꿔 놓았다. 문득, 결국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진부한 얘기지만 그래도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사랑’으로 일평생 다른 곳에서 살아온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 남과 북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그날이 오면 너와 나, 남과 북, 좌파와 우파 모든 경계 따위는 허물어지고 다 같이 어깨춤을 추었으면 좋겠다. ‘고향의 봄’을 부르시던 세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그 광경을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C에게 자랑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도 통일 기념일이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