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이라는 말의 맹점에 대해
'노력'보다는 '운'이 맞지 않나?
어제저녁 나는 은근히 불쾌한 글을 읽었다.
본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한 날씬한 몸에 대한 찬사와 뿌듯함(그렇게만 끝났다면 좋았겠지만)과 그에 대비대는 노오력을 안 하고 자기 관리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냉소적 글이었다.
그 글에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평생을 날씬하게 살아온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살찔 일은 별로 없겠지만-.이라고.
본인 스스로도 유전자의 힘을 믿으면서 어떻게 본인의 성취를 온전히 노력에 깃든 결과물이라고 표현하고 타인에 대한 잣대로 삼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댓글에 장문의 편지를 남겼고 삭제당했다.
삭제빵.
이런.. 화장실에서 고민한 나의 이십여분 간의 글은 올린 지 5분도 안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렇듯 나는 노력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하고 비판적으로 느끼며 한국 사회에 인간미를 없애는 마성의 단어라고 생각한다. 물론 노오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음이다.
노력이라는 말에는 종종 비교와 우열의 가치가 들어간다.
나는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했어
남들보다 더-, 노력했어.
라는 말에는 타인의 노력을 나의 노력과 비교하고 그보다 내가 더 무언가를 했다는. 그런 우쭐함이 들어가 있다.
타인이 인생에 어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사는지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으면서 일견 본 외양을 가지고 혹은 나타나는 결과만 가지고 타인의 노력 여하를 판단한다.
그 어떤 분의 글에 따르면 아마도 본인보다 몸매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얼마 전 대화를 통해 둥글게 나를 비난했던 나의 몬섕긴 신랑은 나의 불뚝 불뚝 화를 내는 성격을 두고 나에게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노력의 기준은 모두 자신이다.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글의 글쓴이는 노력의 예로 하루 한 시간의 요가와 산책, 식이조절(그러면서 본인은 별로 식욕이 많지 않은 타입임을 강조했다.)이면 되는 데,라고 했고
남편은 나 역시 불뚝거리는 부모님을 많이 닮아 어렸을 때는 사고도 많이 쳤지만 지금은 참는 연습을 통해 거의 완벽하게 고쳐지지 않았느냐 보아라- 나의 노력의 결과다! 를 시전 했다.
나는 항변하고 싶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을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가지게 되지 않는다.
아마도 누군가 보기에 결과적으로 노오력이 부족해 보이는 외견을 가진 '나'라는 사람은 아마 어떤 날씬한 사람보다는 식욕이 왕성하고 운동을 하면 피부 두드러기가 올라오며(사실이다! 진짜예요, 두드러기 예방법에 운동 자제라고 나옴ㅠㅠ ) 친가의 아주 진한 불뚝 성질 유전자를 정통 계승한 사람으로 절대 노력의 총량과 종류, 질이 앞의 두 사람과 같을 수 없는 법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을 것부터 생각난다는 나의 사랑하는 친구와 운동과 식이조절, 자신에 대한 인내와 사랑의 여유에 손이 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도 항변하고 싶었다.
모든 이들은 본인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남들이 봤을 때 결과적으로 그것이 완벽하지 않은 것뿐이다.
나도 인생에 어느 시점에는 나의 노력으로 내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노력했기 때문에, 미리 계획하고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지금 남들이 갖지 못한 귀중한 것을 가지게 되었노라고.
그러나 살면서 간접적으로 수많은 인생의 희비극을 전해 들을 때 결국 이 귀중한 것들의 출처는 나의 노력이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모르는 사이 내려진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노력과 부모님의 기도와, 그리고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와 그 날 신호등의 타이밍 같은 것들이 나의 어떤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의 노력이란 어떤 결과를 이루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 하나만을 휘두르며 타인을 판단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다. 타인의 인생은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역경과 고난이 있고 그 안에서 그 사람은 풍파를 헤치며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누구라도 이렇듯 타인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신중하게 생각해준다면 쉽게 노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