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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땃쥐쓰 Feb 13. 2020

열정은 뜨겁기만 한가요

나는 차가운 열정이 좋다



건축 설계학도는 종종 열정이라는 말을 듣는다. 듣는 것 이상으로 강요당한다.


건축설계를 배우신 분 혹은 배우신 분을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소위 '설계'란 밤샘의 준말이고, 야근의 동의어이며, '사생활'이란 방해물에 불과한 어떤 수련의 경지이다.

공중파 직업 다큐멘터리에서 버젓이 사생활을 챙기면서 어떻게 건축을 할 수 있느냐고 훈계를 하는 모 회사의 과장님? 실장님이었나? 가 나오는 업계이기도 하다.


건축이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잠도 자면 안 되고 집에도 가면 안된다. 남자 친구도 없는 게 좋단다.(실제로 들음) 왜냐하면 안 그러면 열정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건축도 모르겠고 열정도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학부를 다닐 때부터 잘 안 그랬기 때문에 열정이 없는 학생으로 취급받았고, 회사에서도 열정이 없는 과장님까지 갔다가 퇴사했다.

다만 열정이 있는 게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컴퓨터나 거장의 책에 코를 박고 밑줄 쳐가며 공부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뜨거운 열정은 없는 게 맞았으니까 억울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가 들은 것 중에 가장 억울한 말은 "너는 설계 안 할 거지?, 할 거니? 진짜?"라고 묻는 모 교수님이셨다. 물론 내가 맨 앞에서 과제를 가장 먼저 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때려치울 기미를 보인적도 없는데 당연히 안 할 걸로 아셨다나.


나의 건축에 대한 열정은 은밀하고 은은하다.

내 인생의 일 순위를 주지는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놔줄 생각도 없기 때문에 음험하고 집착적이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나의 직종을 사랑하고 어떻게든 무언가 해나가고 있다. 다만 아주 느리고 은은하게.


남들이 봤을 때는 어떤 활동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마음속에서는 항상 작은 불씨가 한 켠을 채워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가는 상상을 한다. 설계 외에는 현재 다른 직업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설계일 자체에 불만도 없다.(나에게 불타는 열정을 강요하는 분위기 말고는) 나는 내 맘대로 이것을 집착 대신에 '차가운 열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일본 만화책 주인공처럼 불타는 열정은 본인을 장작으로 쓰고 일을 달성하고는 푸시 시- 꺼지고 만다.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번아웃을 겪거나 중년 이후에 무력감을 얻거나 은퇴만을 간절히 바라는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차가운 열정이란 인생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놓지도 놓치지도 않는 상태로 밀고 당기며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차가운 열정의 단점이란 어쩌면 젊어서 큰 성공이랑은 연이 없다는 것일까.


건축을 사랑한다며 뛰어들었다가 본인의 몸과 마음을 불 싸지르다가 결국 '답이 없다'며 '탈건축'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심지어 그들을 현명하다고 말하는 자조적 기조마저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불타는 사랑만 사랑이 아니듯이 긴 인생 결국 칠십팔십 먹어서도 언제까지고 나의 일을 하면서 늙는 것이 인생이라면 은은한 온돌 같은 애정을 가지고 나의 일을 대하고 싶다.


비록 화끈한 열정보다는 차갑지만 분명 오래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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