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없는 사진은 다시 보지 않는다.
대화가 끝날 무렵. 플래너가 대뜸 던진 질문에 의자 팔걸이를 짚고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앉았다. 내 속이 베베 꼬인 건지 좋게 들리진 않았다. '남들 다 하는데 안 하려고?'. 뭐, 이렇게.
진득한 홍차 향 깊게 배인 작은 사무실이다. 4평 정도. 플래너 뒤로 열어둔 창문에선 청담대로를 오가는 차들이 내는 부릉 소리가 들렸고, 창 앞엔 원목 나무로 만든 엔틱(antique)한 책상이 놓여 이 곳이 사무실임을 알게 했다. 왼쪽 벽면을 덮은 책꽂이엔 LP 음악만 가득했으니, 책상마저 없었으면 딱 음악감상실이다.
"스는 안 해요." "아, 그러시면 혹시 신부께서도... "
'동의하시나요?'라고 묻고 싶었겠지? 죄송하다. 하지만 신부와는 이미 말을 맞춰두었다. 그런데 대답 버퍼링이 길다. 불안하게 시리. 스튜디오 촬영 안 한다고 칼 같이 답해야지!
"네. 드레스 메이크업만 하려고요." "아 그러시면, 말씀하신 대로 계약서 작성하겠습니다.."
플래너는 빈 공간 가득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옵션사항들이 기재되었을 공간이다.
스튜디오 촬영을 제외하자 최초 견적금액의 20%로 내려갔다. 대체 스튜디오 촬영이 얼마란 말인가.
(인) 란에 멋지게 서명한 후 건물을 나섰다. 절약된 돈은 해외 직구 침대를 사는데 보탰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2년 전쯤 방문한 지인 신혼집에서 든 의구심이다. 현관을 들어서자 거실 중앙 벽을 뒤덮은 웨딩사진이 눈에 띄었다. 액사 하단부를 뒤덮은 풀잎 가득한 작은 정원. 중앙에 난 길을 따라 신부가 신랑이 무릎 꿇고 내민 꽃다발을 받으며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선두 사람 다 선남선녀 인덕에 연예인 화보 못지않았다. 내 입에선 '우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색감, 구도 등이 프로의 솜씨였기 때문이다. 신이난 지인은 어디에서 찍었고, 얼마 들었고, 어느 유명한 분이 촬영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인의 입에서 마침표가 나올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뒷목을 주물렀다. 거, 뒷목 음청 뻐근시렵다.
결혼을 앞두고 그 집에 다시 놀러 갔다. 신발장에 신고 간 구두를 벗으며 허전함을 느꼈다.
"저기 있던 웨딩사진 어디 갔대요?"
지인은 씩 웃으며, 고개를 절래 흔들며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보여주었다. 침실 문 뒤편에 가려진 웨딩사진을.
"이거 어디에 버리지도 못하겠더라고."
머쓱해하던 지인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돈 백만 원짜리 허망한 결말. 왜 그 사진은 안방으로 밀려났을까.
'~했었다.'가 맞는 걸까, '~했었는데, 그날 날씨가 이랬고, 우리 이런 이야기도 했었잖아, 기억나?'가 맞는 걸까. 웨딩 사진 찍는 이유야 여러 가지 겠지만, 나는 궁금했다. 내가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장면인가, 이야기인가.
"자, 신랑, 신부 허리를 손으로 감싸시고요."
꼭 맞는 검은색 턱시도와 허리를 죄는 하얀색 드레스. 점점 뜨거워지는 강한 조명과 거대한 카메라 렌즈.
사진사의 지시에 맞춰 움직이던 남녀는 경직된 지 오래다.
무엇을 추억할 수 있을까. 경직된 분위기? 숨 막히는 드레스와 조여 오는 너의 손길?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사진이라면, 사춘기 시절 방에 걸었던 연예인 사진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이런 사진을 찍었었지.'로 끝날뿐이다.
차라리 작은 카메라를 하나 사들고, 신혼여행에서 잘 찍은 사진을 액자로 걸어두는 것은 어떨까.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서 말이다. 내가 찍은 게 가치 있지 않을까. 조작이 어렵다는 이야긴 말자, 요즘은 카메라가 알아서 다 세팅하여준다. 'P 모드'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폰카 이야긴 하지 말자. 좋은 카메라는 화질도 좋지만 어느 환경에서든 동일한 퀄리티 사진을 뽑아준다. 그래서 아직 폰카가 카메라를 못 따라간다.
그리고 촬영한 사진을 10년 뒤 집 거실에서 자랑해보자.
"엄마 아빠가 신혼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야. 하와이를 갔었는데 어찌나 멋있던지. 날씨도 괜찮았고, 여기서 이런 것도 먹었었단다. 아 그 사진은 저쪽에 있어. 나중에 같이 가볼까?"
글쎄, 난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결혼 2년 후, 스튜디오 촬영 앨범을 다시 펴보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