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가장 영리했던 인물을 꼽는다면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Sisyphus)'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리한 머리를 이용해 올림푸스 신들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죽은 후 가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커다란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굴려 올려야 했고 꼭대기에 도달하면 바위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또 다시 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영원히 반복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신들을 기만했던 것은 무엇보다 제우스의 미움을 영리하게 피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에 제우스의 미움을 샀던 이유는 단지 제우스가 아이기나라는 여성을 유괴했을 때 그 사실을 여성의 아버지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그에게 죽음의 신을 보냈고 그는 그의 탁월한 머리를 사용해 죽음의 신을 속여 쇠사슬로 묶어 버렸다. 그 덕분에 잠깐이지만 사람들은 죽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저승에 끌려가서도 결국 영리한 꾀를 내어 다시 살아 돌아왔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다시 찾아 누렸다.
그러나 결국 수명을 다해 저승으로 간 그는 노한 신들에 의해 가혹한 형벌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영리했던 그였기에 더욱 잔인하게 느껴지는 형벌. 이 단순한 쳇바퀴같은 형벌을 받으며 그는 과연 어떤 생각과 마음이 들었을까? 육중한 바위의 무게를 지탱하며 산 꼭대기로 바위를 올릴 때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힘겹게 굴려 올린 커다란 바위가 속절없이 다시 산 아래로 떨어진 후,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산 밑으로 내려가는 시간에는 어땠을까? 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일 수 있었을 그 시간, 터벅터벅 산 밑으로 내려가며 인간 중 가장 영리하기로 유명했던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에 대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책 <시지프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생각을 추측해 본다.
"나는 이 인간이 무거운 그러나 한결같은 걸음으로, 종말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본다. 휴식과도 같은 시간, 그리고 그의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중략)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그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비참한 조건에 대해서이다. 아마도 그의 괴로움을 이루었을 그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킨다. (중략)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케 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통해서 '부조리'에 직면한 우리 인간의 현실을 통찰한다. 시지프스가 받고 있는 영원한 형벌을 통해 우리 인간의 노동이 갖는 부조리한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산 꼭대기로 육중한 바위를 굴려 올리듯 내일도 모레도 똑같이 버텨야 함을 알면서 우리는 오늘의 노동을 힘겹게 버틴다. 한 때 잠시 노동이 '소명(calling)'이라는 이름의 신성한 행위로서 인정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산업화 이후 헨리 포드(Henry Ford)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은 기계의 부속품과 자신들의 차이를 알기 힘들다. 그나마 카뮈의 통찰이 던져주는 희망 한 줄기는 적어도 그런 우리 자신을 우리는 스스로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눈을 뜬 상태에서 부조리에게 뺨을 내줄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킨다. 하지만 어쨌든 힘든 것은 힘든 것이고, 아픈 것은 아프다. 다음 날의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이 즐거운 사람이 요즘 얼마나 있을까.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에서 직장인 952명을 대상으로 ‘직장인 증후군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를 보면 95.9%가 ‘직장인 증후군을 겪고 있다’고 답했다. 직장인 증후군 1위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도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끼는 ‘만성피로증후군’이었다. 그리고 2위는 현재 직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파랑새증후군’이었다.
이렇게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카뮈의 통찰은 유효하다. 오늘날에도 시지프스의 그 허망한 땀방울과 한숨은 여전히 열기를 잃지 않고 눈앞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하루의 가장 커다란 비율을 차지하는 노동의 시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부조리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지프스의 형벌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외침이 세계의 구석구석 작지 않은 목소리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지프스의 형벌이 사람들에게 알려진지 약 3,000년이 지난 지금,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바로 '제4차 산업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다.
제4차 산업혁명은 이전의 혁명들과 선언의 시기에 있어서 특히 구별된다. 제1차~제3차 산업혁명은 그를 통해 실제 사회의 많은 부분이 바뀐 후 명명된 '사후적' 선언이지만, 제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다가올 혁명을 선언하는 '사전적' 선언이다. 지금의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전과 혁신이 가져올 대규모의 변화를 혁명적 관점에서 미리 선언한 것이다. 그 혁명의 선언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은 바로 스위스의 알프스 아래에 있는 작은 관광 도시, 다보스(Davos)였다.
매년 초 전 세계의 주요국 정상들과 세계적 기업가 및 저명한 학자들은 다보스(Davos)에서 개최되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에 참석하여 세계의 경제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글로벌 이슈들을 논의한다. 이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을 처음 만들고 이끌어 오고 있는 사람은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교수이다. 그는 2016년에 열린 포럼에서 '제4차 산업혁명'을 선언하며 그 화두를 전 세계의 리더들에게 던졌다. 제4차 산업혁명은 그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정부, 기업 및 학계의 최고의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집단적 지혜(collective enlightened wisdom)를 구성해 도출한 결론이었다. 이미 4차 산업혁명은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가져올 변화는 속도나 규모, 범위와 복잡성에 비추어 봐서 과거 인류가 겪어온 다른 어떤 변화보다도 거대한 변화가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이런 엄청난 변화를 모든 사람들이 미리 잘 이해하고 공감대를 갖고 있어야 제4차 산업혁명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며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인류 공동의 번영 극대화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런데 현재는 이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직접 나서서 4차 산업혁명을 선언하고 공론화했던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통해 로봇 등의 첨단기술의 도입의 혜택은 결국 교육 수준이 높은 1퍼센트가 독점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될 수록 그 로봇 및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제하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어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따라서 제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에 대한 클라우스 슈밥 교수의 우려는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요인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도 다양한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 중 특히 옥스퍼드 마틴 스쿨의 칼 베네딕트 프레이(Carl Benedikt Frey) 교수와 마이클 오스본(Michael Osborne) 교수의 연구 결과는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공지능과 로봇기술의 발달로 인해 약 20년 내에 현재 직업의 거의 절반이 자동화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연구 결과를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우리의 불안한 미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전망은 지겹고 단순한 우리의 육체적 혹은 지식 노동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곧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지겨운 노동에서 우리 인간은 이제 강제로라도 '해방'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곧 제4차 산업혁명을 통해 시지프스의 영원할 것 같았던 형벌도 이제 우리 현실에서 진짜 끝날 수 있게 됐다고 전망할 수 있다.
'로봇(robot)'이란 단어는 1920년에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가 발표한 희곡 작품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고된 허드렛일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나온 단어이다. 따라서 로봇이란 단어 자체에 이미 인간의 고된 노동을 대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렇게 20세기 초에 이미 로봇이란 단어가 나온 만큼이나 인류는 일찍부터 기계를 통해 일상의 많은 영역에서 노동 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을 해 왔다. 한 예로 '세탁기'의 발명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도 강조했듯 여성들이 가사 노동에서 해방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어 줬다.
또한 우리 인류는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 시간 자체를 단축하고자 산업화 이후 꾸준히 피 튀기는 투쟁을 해 왔다. 산업혁명 초기에 사람들은 하루에 15시간씩 노동을 하기도 했지만, 노동자들의 수많은 희생과 격렬한 투쟁으로 결국 1919년에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천명했고 전 세계에 정착되어 나갔다. 그리고 1936년 프랑스에서는 주5일 근무와 함께 주 40시간 노동제를 처음 실시했으며, 1998년에는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했다. 현재 유럽에서는 주 30시간으로도 노동시간이 단축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노동 시간이 줄어드는 것에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우리 현실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시간을 절약해 주는 정말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는 '타임 푸어(Time Poor)'들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작가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은 <시간의 놀라운 발견>이란 책을 통해 시간의 부족은 시간 자체와는 별로 관계가 없고 그 사람의 태도와 관점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따라서 수천 년 혹은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짧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해 온 허망한 노동 의무에서 실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을 목전에 둔 지금, 우리 인류는 그 비어질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때가 됐다. 지금까지 어깨를 짓눌러온 육중한 바위가 사라지고 가볍고 평온하게 두 발을 땅 위에 딛고 서게 된 우리 인간은 이제 앞으로 어디를 향해 그 발걸음을 옮겨야 할까? 방향성을 상실한 자유는 당연히 진정한 자유일 수 없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미래 문명의 발전은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곧 문명의 수준은 여가를 수용하는 수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그의 책 <정치학(Politics)>에서 여가를 통해서야 비로소 인간은 최선의 시민이 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곧 최선의 정체(政體)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여기서 ‘여가’란 단순히 놀이나 휴식의 시간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아를 완성해 가는 시간이며 따라서 여가를 잘 누리는 것은 곧 우리 삶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요조건이다. 또한 그렇기에 여가는 주어지면 그냥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려 깊은 안내 또는 그를 위한 적절한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이루어질 시지프스의 해방의 의미는 단순히 더이상 무거운 바위를 무의미하게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가혹한 형벌의 상황이라는 '비정상' 상황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의 삶을 사는 '정상' 상황으로의 이행 문제가 된다. 곧 나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내는 문제이며, 나의 실존이 공명하는 진정한 욕망과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해 줘야 할 영역은 무엇보다 '교육' 분야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교육계는 이에 대해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 피라미드처럼 서열화된 대학 진학 중심으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며 소수를 가려내고자 절대적 다수를 낙오자로 만드는 우리 교육의 전근대적 시스템은 여전히 견고해 보인다.
저명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 교수는 현대의 공교육 시스템은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고 지적을 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거대한 구조적 변화가 다가온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나 또한 그가 지적했듯 기업의 변화 속도를 100마일이라고 한다면 학교의 변화 속도는 10마일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만큼 교육계의 변화 속도는 더딘 경향이 크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의 속도는 굳이 우리의 처지를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현재 우리는 얼마나 준비를 하고 있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제는 정말 경각심을 갖고 추상적 담론을 넘어 당장의 급박한 현실 문제로 돌아볼 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