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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윤 Nov 30. 2017

‘장애’, 사회 혁신과 발전의 문을 여는 황금열쇠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현재 고속·시외버스를 탈 수 있을까? 없을까?


정답은 “전혀 없다”이다. 시내에서 저상버스를 적지 않게 봐 온 시민들 중에서는 이 이야기가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 같다. “전혀” 타지 못한다니. 그러나 전국 약 1만여 대의 고속·시외버스 중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갖춘 버스는 단 한 대도 없다. 청주고속버스터미널의 경우 장애인들이 표를 수월하게 살 수 있도록 전용 창구를 마련해 놓고 있지만 정작 그들을 배려한 고속버스는 단 한 대도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현실이다.


우리가 시외로 다니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중 교통편은 대표적으로 고속·시외버스, 기차, 택시, 국내선 비행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차역이나 공항은 주로 대표적인 지역 위주로 자리하고 있는 반면 시외버스터미널은 지역 안으로 보다 깊숙이 들어가 더욱 많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이용 요금은 KTX의 절반 가격밖에 안 되며, 심야고속버스가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이용의 폭이 더 넓다. 따라서 현재 장애인들이 고속버스 이용을 아예 못하고 있는 것은 ‘이동권’이라는 그들의 중요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지난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지금의 상황을 인권침해 상황으로 보고 ‘국토교통부’로 하여금 시외버스에 휠체어 사용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고, 장애인이 사전 예약으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를 했고, ‘기획재정부’에 대해서는 국토부가 관련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교통사업자에 대한 재정·금융·세제 지원을 확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는 말 그대로 권하는 ‘의견’일 뿐 강제력이 없다.


따라서 정부를 실제로 움직이고 시민들에게도 지금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 장애인 인권 단체들은 매년 명절이 되면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여 시위를 해 오고 있다. 이에 지난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서도 장애인 활동가들은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여 고속버스 티켓을 사고 그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번에는 아예 무릎을 꿇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호소를 했다. 이에 국토교통부의 김현미 장관은 직접 현장에 나와서 무릎 꿇은 장애인들과 악수를 나누며 위로를 했다. 반면 2014년 장애인의 날, 바로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시외버스 탑승 시위 때 장애인들은 최루액을 뒤집어쓰며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을 당했었다.



장애인들이 그들의 이동권 확보를 위해 이런 피땀어린 노력을 시작한 계기는 2001년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장애인 노부부가 떨어져 다치고 사망한 사건이었다. 당시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들에게 지하철 말고는 대중교통 선택권이 없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들은 연대하여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되었고, 5년마다 국가교통부로 하여금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시내 저상버스, 장애인 콜택시 등을 통한 이동권 확보 방안과 그를 위한 예산·재원 마련 계획이 의논되고 마련됐다. 그 계획에 따라 2016년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저상버스 비율을 41.5%로 늘리는 목표가 설정됐는데, 2016년 기준으로 시내버스의 19%가 저상버스로 바뀌었다. 원래의 목표치에는 크게 미달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우리가 일상에서 저상버스를 흔히 탈 수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장애인들의 피땀어린 이동권 쟁취 노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저상버스를 이용할 때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도 함께 탑승하는 경험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그러한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어떤 느낌과 인상을 받고 있을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을 넘어서 불만을 갖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사람들이 갖게 된 불편의 정체는 무엇일까? 불만을 갖는다면 그 불만은 올바른 방향일까? 우리는 이 때 가질 수도 있는 불편과 불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시민’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뒤엉켜 끊임없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생생한 우리 삶의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저상버스 출입문 아래에는 경사판이 설치되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버스를 잘 타고 내릴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경사판이 밑에서 나올 때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고 개인적 경험으로는 운전기사가 그 상황을 능숙하게 대처하는 모습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급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버스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멈춰서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인가, 느린 경사판인가, 대처가 미숙한 운전기사인가? 장애인에 대한 낯섦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거부감을 갖는 그 ‘장애’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장애’를 단순히 신체적·정신적 손상뿐만 아니라 ‘활동’ 및 ‘참여’의 제약으로 정의한다. 곧 개인의 기능적 장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의 상호작용 차원에서 장애를 정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잘 알고 보면 장애란 신체적·정신적 손상만을 가리키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함께 우리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달라지는 유동적 개념이다.


책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저자 이진경 교수는 장애의 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애는 ‘환경’ 곧 그가 살아야 할 조건과 만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가 갖는 특이성과 그가 처한 생존조건 사이에서 발생한 ‘불화’를 통해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불화가 없다면 장애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그는 ‘시력’을 든다. 안경을 쓴 사람들은 많은 경우 1미터 앞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분명 상당한 신체적인 장애이다. 하지만 안경을 통해 그 사람과 환경 조건 사이의 불화는 사라져 버리고 우리는 시력이 나쁜 사람들을 특별히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안경을 쉽게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시력이 나쁜 사람들도 장애인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최빈국에서는 안경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시력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개발원조 사업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안경의 보급이다.


이렇게 장애는 사람이 처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좌우된다. 만약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완전히 보장되어 그들의 이동과 관련된 불화가 모두 사라진다면 그들의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안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를 단순히 ‘정상 대 비정상’으로 보는 이분법적 시각은 적절할 수가 없다. 장애는 우리가 얼마나 환경에 잘 적응하고 대응하는가라는 유동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진경 교수는 더 나아가 장애를 ‘문명’의 전제조건으로도 해석을 한다. 주어진 세계를 살아감에 있어서 불편함과 불화를 만드는 자연적·사회적 ‘문턱’이 우리 존재를 ‘장애자’로 만들기 때문에, 그 장애들을 극복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장애자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우리 문명과 기술이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이성에 대해서 유난히 ‘장애’로 규정하며 그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소수성’이 그 원인일 수 있다고 이진경 교수는 진단한다. 그들의 소수성으로 인해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이 부딪힌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기술과 장치가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면서 그 장애는 계속 장애로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는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신체적·정신적 ‘손상’의 범주뿐만 아니라, 성, 재산, 민족, 인종이라는 범주로까지 확장하여 살펴보게 만든다. 이러한 정치성으로 인해 우리는 ‘빈곤한 자’를, ‘성적 소수자’를 너무나 쉽게 ‘장애자’로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 문제는 이러한 문턱을 유지하려는 자와 제거하려는 자 사이의 정치적 투쟁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성격은 반대로 장애를 ‘장애’가 아니라 발전과 혁신을 위한 ‘원동력’이자 ‘기회’로도 볼 수 있게 한다. 혹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발전을 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도 삼을 수 있다. 저상버스의 경사판이 좀 더 빠르고 정확하게 나올 수 있게, 운전기사들이 보다 능숙하게 상황대처를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일상 영역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혁신과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기회인 것이다.


게다가 저상버스는 단순히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한 버스로만 머물지 않는다. 저상버스는 노약자들이나 어린이가 보다 안전하고 수월하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혁신’ 버스로도 기능을 한다. 지하철의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 노력의 과정에서 보편화됐다. 그러나 현재 지하철 엘리베이터의 주 이용층은 바로 노인들과 유모차를 끄는 주부들이다.


이렇게 혁신된 버스가 현재는 전체 버스 중 19%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가 이용하는 모든 버스가 혁신된 버스로 바뀔 것이다. 국토교통부에서는 2016년부터 80억 원을 들여 고속·시외버스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기술개발 연구를 시작했고 2019년까지는 그 결론을 낼 예정이다. 이렇게 고속·시외버스의 개선과 혁신도 이미 시작됐다. 이들 혁신의 모든 것이 다 장애란 문턱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장애를 직면하여 그를 우리 사회 혁신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장애가 저기 있구나, 혁신의 기회가 바로 저기 있구나 하고 먼저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편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질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지금 우리는 어쩌면 아직 충분히 불편하지 못한 것은 아닐지 한 번 묻고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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