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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NI Oct 15. 2021

1. 생의 외침

모순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없어한다.​


양귀자 '모순'




부산에서 오래전 살던 집터를 다녀왔다. 그때가 아마 90년대 초중반이었던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언젠가 떼어놓은 초본을 보면 정확한 기간을   있을텐데. 엄마는  부산에 가면 예전에 살던 동네를 가고 싶어했다. 남구 감만동, 대연동이라 불리는 동네인데 힘들게 어렵게 살던 시절을 뭐그리 찾고 싶어할까 의아했다. " 그렇게 여길 오고 싶었어?" "그냥 예전에 살던  생각나서" 아마 아빠를 여기에 데려왔으면 크게 잔소리 들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여길 오지도 않았겠지. 힘들던  시절을 굳이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아빠의 속내를  알고 있었다. 아빤 전주로 이사  98년도   이후로 부산에 방문한 적이 없다. 20년이 훌쩍 넘었다. 부산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있지만 그렇게 가고 싶어하진 않으신다. 속으론 어떨지 모르겠다. 광안대교도 부산항대교도 못보셨을텐데 달라진 해변가의 모습을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보는 것만 못한데, "아무리 달라졌어도 가면 길이랑 동네는  찾아" 아빠의 길부심은 여전하시다.​


 사진에 아무렇게나 자란  너머로 보이는 작은 쪽문이 우리가  얻어 살던  출입문이다. 조그마한 마당에서 개도 키웠다. 스피치 종류였나? 개집이 있어서 개집에 줄을 매달아 묶어놓았는데,  글쎄  녀석이 발정이 났는지 개집까지 통째로 끌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알고보니  동네 꼭대기 어느 산에 개장수가 있었는데 거기에 지발로 찾아갔다나 뭐라나 암튼 다른 개들이 많이 사는 어느 동네로 뛰쳐나간 모양이었다. 나름 예삐 여기고 정을 붙였었는데 한순간 사라진 강아지 때문에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이별이었다. 그게  마지막 반려견에 대한 추억이다. 이후에는 절대 동물을 키우지 않기로 했고, 지금은 비록 냥이와 함께 살고 있지만  생각은 변함이 없다. 냥이 이후에 반려동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누군가 그러더라, '사람은 장담하면 안된다' 지금 마음은 '절대'라고 말하지만 사람일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암튼간 그 쪽문이 있던 그 집에서의 추억이 나는 아직도 조각조각 떠오른다. 아주 어릴때였나 내가 엄마한테 받은 용돈 몇백원을 친구한테 그냥 주었었나보다. 아마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든가 그래서 내가 줬겠지. 아무 이유없이 주진 않았을건데,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는 엄마가 노발대발해서는 왜 친구한테 돈을 주느냐고 난리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나를 잡아먹을 듯이 쫓아오는 엄마를 피해 집으로 뛰쳐 들어갔고 곧바로 안에서 문을 잠갔다. 그리고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방구석에 숨어 있었는데 엄마가 문 열으라고 큰소리로 대문을 쾅쾅 두드리고 뭐라뭐라 외치는데 얼마나 오금이 저리고 사지가 발발 떨리던지. 엄마한테 그렇게 크게 혼난 적은 처음이었다. 문을 열긴 열어야 할텐데, 타이밍을 몰라 겁을 먹고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는 화장실 창문 쪽으로 어떻게 타고 들어와서는 집안으로 들어와 나를 빗자루로 호되게 때렸다. 아팠는지 안아팠는지는 몰라도 내 마음의 상처는 엄청 깊었다. 모르겠다 맞을 짓을 하긴 한 것 같은데 엄마의 그렇게 화난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남구 감만동, 대연동 그 동네가 원래도 못사는 동네였지. 부산은 대부분 사는 동네가 산아니면 언덕배기에 있어서 걸어다니는 게 여간 힘든게 아니다. 매일이 등산하는 기분이다. 못사는 곳일 수록 더욱 그랬는데 그 쪽문 빌라가 있던 동네도 워낙 꼭대기라 계단이 깨끔박져서 지금 내 체력으로 올라가려니 죽겠는거다. 예전엔 어떻게 매일마다 이 길을 다녔을까? 엄마는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여기가 김밥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라고 중얼거렸다. 어느정도 나를 키워놓고 내가 초등학교를 갔을 무렵이었나, 엄마는 돈을 벌겠다며 김밥집에서 일을 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구박 받으며 다녔으면 주인 아주머니가 어찌어찌해서 힘들었네 뭐를 하는데 힘들었네 얘기를 하면서도 여기가 그 김밥집 자리라고 계속 여러번 확인을 하고 또 하고. '없어졌네.. 없어졌겠지' 라며 슬픈 얼굴을 하는거다. 아니 그렇게 힘든 기억인데 왜 없어진 김밥집을 찾는거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예전 추억이 다 그런거야' 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 때 김밥 마는 걸 마스터 해서 누드김밥도 말 줄 알고 뭔 김밥 뭔 김밥 다 만들고 그런거라고. 그럼 뭐해! 나 소풍갈 때 누드김밥 안 싸줬잖아! 누드김밥은 커녕 사다준 김밥을 싸줬던 것 같은데. 유부초밥 먹은 적도 몇 번 있는 것 같고

내가 살던 동네에 집터가 그대로 있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뒤집어 엎은 건 아닌가보다. 여기도 재개발 구역인데 오래전 부산의 풍경을 떠올리면 절대 안된다. 너무 많이 변했고 그냥 너무 많이 변해서 슬펐다. 변하는게 왜이리 싫을까. 예전에 살던 집도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고 예전에 살던 풍경도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고 그 길도 골목도 모두모두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뭐든지 땅을 뒤집어 엎어서 거기에 뭘 세우고 짓고 새로 만들고 여기가 거기였는지 알수도 없을 만큼 변해버린 부산이라는 도시가 나에겐 암흑이었다. 말도 안되게 높은 건물들은 왜 그렇게 바닷가에 뭉텅이로 지어서 보는 사람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지.

부산 토박이인 요트 선장님이  말이 떠올랐다. 저렇게 건물 높고 어쩌고 해도 부산 사람들 못살아요. 저거 분양도  안되어있고 사는 사람들도  서울사람 아니면 외국인이에요. 부산사람들 사는거 똑같아요. 예전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보는 거랑 현실은 틀려요. ​


어쩐지 씁쓸했다. 나는 그래도 부산이 예전보다는 잘살았으면 했다. 잘된사람은 잘됐겠지. 안된 사람은 여전히 같을 것이고  다를  없는 일상인거지. 그래도 겉으로 보여지는 화려함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도시의 불빛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났을까. 우린  떠난 걸까.   다시 이곳이 그리운걸까.


남광빌라 쪽문이 있는 집에 세들어 살다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우리가 살던 동네 바로 아래에 새로 지어질

자유5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 가족의  아파트,  내집마련

 분이 겪은 고난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절대 갖지 못했을 지금의 안정감.

내가 다음 생에서도 값지 못할만큼 고귀한 그것

그 은혜가 너무 커 사진을 쉬이 꺼내볼 수 없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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