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싫을 때가 있어
- 오빠는, 이혼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 아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그렇단 말이지. 그런 사람이 왜 싸울 때면 마치 내일부터 나와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건데. 우리 부부는 싸움의 이유도 방식도 화해하는 타이밍도 어느 하나 맞는 것이 없다. 같이 좋아하는 걸 함께할 때는 세상 둘도 없는 찰떡궁합인데, 싸울 때는 영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우리 싸움에 장르가 있다면
그건 바로 '미스테리 스릴러'
첫 번째 미스테리.
왜 이런 걸로 화가 나지?
보통은 남편이 먼저 싸움을 시작하는 쪽이고 남편 말로는 그렇게 만드는 원인유발자는 나라고 한다. 남편은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무신경하고 무논리적인 행동에 초감각적 수준으로 반사적인 혐오를 표현하거나, 다소 무례하고 철딱서니 없는 내 사고에 점층적으로 피로가 쌓여 다른 핑계로 비난의 서사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어느 쪽이든 당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 시작이 늘 갑작스러운 데다가 폭발력도 대단해서 지뢰를 밟은 수준의 느낌이다. 그냥 순전히 내 입장에서 내 감정에만 충실하게 표현하자면 요즘 핫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가 된 것 같달까. 아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룰은 알지만 요정도 움직이는 것도 쏴 죽일 정도인지 몰랐지. 젠장.
두 번째 미스테리.
왜 항상 내가 지는 거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남편이 해준 바가 있다.
- 네가 잘못해서 싸우게 되니까 결국 네가 지는 거야
그런데 '잘못'이라는 게 항상 객관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때로는 나였으면 화내지 않았을 일인데 남편이 화를 낼 때 솔직히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뒤늦게 깨닫거나 끝끝내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마치 추적 드라마처럼 남편의 감정선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남편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공격을 하는데 화가 난 이유가 지극히 감정적일 때조차 논리를 붙이려다 보니 열심히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될 때가 있다. 나도 어휘력이나 문장력은 떨어지지 않는데 남편의 언어 사전은 어렵다 어려워. 내가 못 알아들으면 언성을 높이거나 묵언수행을 해서라도 본인이 옳음을 관철시켜야 하는 남편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지는 나는 싸움을 빨리 매듭짓고 싶어서 성급하게 백기를 휘두르기도 한다. 수긍을 하든 아니든 어쨌든 패배는 나의 것이다.
세 번째 미스테리.
왜 화해도 당해야 하는 거지?
남편은 싸울 때 장전해 둔 총알을 다 소진하고 장렬히 뻗은 나에게 확인사살까지 하는 치밀함 덕분에 싸우고 나서 혼자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 열이 가라앉으면 개운하게(?) 화해를 청한다. 싸울 때 마치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싸우는 것과 비슷하게 화해할 때도 마치 싸운 적이 없는 것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를 슬며시 건넨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에 있는 총알을 만지작만지작만 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오는 공격에 미처 장전할 새도 없이 그대로 집어던지다 보니 타격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싸움이 끝나버릴 때가 있다. 그래서 휴전 상태일 때 오히려 화가 더 올라오는 편이다. 내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해명하고 싶고, 나는 어떤 부분이 서운했는지 설명하고 싶은데 그러면 또 남편은 대비된 방어를 맹렬하게 하겠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지 않으니 관두자. 남편이 기분이 풀리면 '지금은 이야기해도 받아주겠지?'싶어 이야기를 꺼냈다가 결국 또 똑같은 싸움을 반복하게 된 적이 많았다. '너는 내가 기분 좋으면 그대로 두지를 못하겠어?'라고 하면서. 그래 놓고 왜 본인은 본인이 화가 풀리면 나는 무조건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화가 안 풀린 티를 내고 싶은데 그마저도 평소에 '응응!'이라고 답장하던 걸 'ㅇㅇ'이라고 바꾸는 소심한 반항이 최선이다. 아무래도 남편은 갈등보다는 오해가 싫은 사람이고 나는 갈등 자체가 싫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나 보다.
복수는 나의 것
영원히 나만의 것
- 오빠는 아마 나 먼저 죽으면 내 무덤 앞에서 후회의 눈물을 펑펑 쏟을 거다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맺혀 죽어서라도 복수를 하겠다는 심뽀로 이렇게 말하면 남편의 대답이 더 가관이다.
- 응, 그래서 내가 먼저 죽으려고.
두고 봐라, 내가 내일 이혼 서류 떼다가 코 앞에 흔들어줄 테다 생각하지만 다음날 해가 뜨면 또 이혼 서류 떼러 가는 게 귀찮아질 정도로 의욕상실. 게다가 이혼하면 혼자 살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 내가 다시 사회에 반환할 거였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피 터지게 싸우며 그나마 개도(?)시켜 놓은 부분은 억울해서 안되지 싶고.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복수는 결국 내 상상 속에서만 엄청 스펙터클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가 완전히 손해만 보는 건 아니었다. 남편은 싸우는 데 최선을 다 한 만큼, 그렇게 했는데도 바뀌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하나씩 포기를 했다.그리고 우리 둘 다 '어차피 또 금세 화해하게 될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직 이렇다 할 복수를 해보지 못했다.
해피엔딩 말고
해피 에피소드
행복한 결말이라는 건 부부사이에 없는 것 아닐까. 일단 웬만해선 죽기 전까지는 '엔딩'이 없는 사이이기도 하고(무섭네) 평생 맞춰가는 게 함께하는 일생의 과업이라 오히려 그 과제가 사라지면 평화보다 무관심이 찾아올 것 같다.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엔 그렇다. 서로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지극히 불투명한 기대도 상대에 대한 애정이 있어 생기는 거니까. 싸우고 나면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치지만 또 둘이서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생각하며 덮어나가는 것 같다. 정말 맛있는 생크림과 빵 사이사이 싫어하는 건포도가 박혀있는 것처럼. 그래도 그 빵 자체의 맛은 포기할 수 없어서 또 사 먹는 것처럼. 건포도가 내 걱정보다는 조금 들어있길 바라면서 지내본다.
+ 아마 지난달에는 건포도를 실수로 때려 넣었었나 봐? 근데 나 건포도 이제 제법 먹을 줄 안다구. 냠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