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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Jun 06. 2022

결혼, 해보니까 좋더라구요

결혼이 좋아 일로 삼은 웨딩플래너


보아도 보아도 질리지 않는 드레스들


살면서 내가 결혼만큼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가 있었을까 싶다. 준비기간이 3개월로 너무 짧았던 것도 있었지만 목표가 뚜렷할 때 더욱 투지가 생기는 내 성향 때문에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을 위한 미션들을 좌표 삼아 나아가는 내 걸음 앞에 선택의 기로가 수도 없이 놓여 있었지만 낫으로 나무를 베듯 거침없이 전진했고 남편은 내가 내놓은 길을 군소리 없이 따라왔다.


단 한 번의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남들은 두 군데만 돌아도 지친다는 드레스투어를 무려 네 군데를 하고, 본식스냅 업체는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샘플을 50군데 넘게 살폈다. 내가 결혼했던 2013년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DVD촬영도 업체에 직접 찾아가 미팅을 하면서 추려나갔다. 그와 동시에 파리행 항공권을 발권하고 2주일에 이르는 자유여행 일정표도 엑셀에 틈틈이 정리했다. 결혼식 한 달 전에 스튜디오촬영을 했음에도 모바일청첩장 뿐만 아니라 포토테이블용 인화는 물론 답례카드까지 만들었다. 신부 입장부터 퇴장까지 모든 상황에 맞는 음악의 MR을 다운로드하여 웨딩홀 측에 식순과 함께 보내고 사회자에게는 대본까지 직접 써서 전달했다. 내가 예측하지 못하는 낯간지러운 애드리브나 이벤트는 절대 없어야 했다. 진부하지만 효과적으로 눈물을 뽑아내는 구슬픈 음악이 부모님께 인사할 때 나와서는 안됐다. 결혼식 전날에는 포토테이블에 놓일 액자와 소품들의 위치까지 직접 잡아 사진으로 찍어 동생에게 보내 두었고 플라워샤워를 위한 고깔도 직접 만들어 바구니에 나누어 담았다. 극강의 'J'가 기획한 결혼식은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었고 양가 부모님과 하객들은 예식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고 칭찬해주었다. 매번 영문도 모르고 계약금 결제하기에 바빴던 남편도 식 당일 세세한 부분 하나까지 내가 고민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남편 몰래 준비했던 아주버님의 축사는 남편을 울렸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며 울컥하기도 했지만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라는 뿌듯함에 눈물샘보다 입꼬리가 실룩였다.


남들은 혀를 내두를 추진력과 정보 수집력으로 단숨에 결혼식을 완성한 경험은 나에게 설렘보다는 성취감이었다. 남편이랑 똑같이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하느라 야근 아닌 야근도 많이 했다. 빠듯한 일정에 매 순간이 고민과 선택이었으니 데이트를 할 때도 내 손에는 항상 to do list 가 들려있었다. 팀장님처럼 결정과 의견을 채근하는 나에게 남편은 스트레스받을 거면 그냥 아무거나 하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말이 나를 열받게 했다. 아무거나라니. 완성도는 디테일인데 어찌 저런 무심한 발언을 한단 말인가.


그렇게 결혼준비를 하면서 알아보던 것들이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예쁜 것 중에 예쁜 걸 고르는 걸 싫어하는 여자는 없겠지. 예산의 허들도 있었지만 주어진 예산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기쁨도 괜찮았다. 지나 놓고 '그때 더 알아볼 걸'이라는 후회만 남기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신부로서는 알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아마 그때 나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셨던 플래너분은 내가 말한 예산을 철저히 지켜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워낙에 따로 찾아보는 게 많으니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다른 선택지를 보태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나는 까다로운 신부였지만 그렇다고 까탈스럽게 구는 신부는 아니었나 보다. 그 플래너분으로부터 웨딩플래너를 한 번 해보면 어떠냐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솔깃했지만, 결혼 직후 카드값을 갚느라 허덕이던 나에게는 안정적인 월급이 필요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와중에 새로운 일에까지 적응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웨딩플래너라는 일이 나에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어렴풋한 짐작만 품은 채 몇 해를 보냈다.


결혼생활의 인트로를 임팩트 있게

퇴사를 하고 떠난 90일 동안의 유럽여행의 시작은 동생의 결혼식이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는 동생 덕분에 유럽의 하우스웨딩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했던 결혼식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기에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어깨너머로 보기에도 여기에서의 결혼준비는 플래너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 보였다. 확실히 웨딩플래닝이 비즈니스가 되기에는 한국의 시스템이 제격이었다. 그보다는 그 공간에 가득한 축하와 행복의 분위기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이렇게 좋은 날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돕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 아닐까. 결혼식뿐만 아니라 결혼준비 과정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플래너가 된다면 어떨까. 내가 결혼식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건 내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경험과 외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던 동생의 결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혼 후에 나의 생활이 그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성해졌기 때문에 결혼생활 자체에 대해 진심으로 만족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말이다. 단순히 경제적으로만 따져본다면 엄마아빠랑 같이 살 때가 훨씬 나았다. 서울의 그 지역에 있는 그 아파트에서 출퇴근하는 호사? 죽기 전에 다시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번 돈은 내 용돈으로 다 써버리는 철딱서니 없는 짓도 이제는 못한다. 철없던 딸, 그나마 일찍 결혼해서 불효를 덜 했다는 것이 효도라면 효도인 듯. 하지만 결혼을 하고 누군가와 '운명공동체'가 되어 합당한 책임감을 부여받고 나니 인생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달라졌다. 평등한 관계에서 오는 자율성이 커지면서 내 필요와 만족에 그럴싸한 핑계를 찾는 대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아주 천천히였지만 분명히 나는 좀 더 성숙해졌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지만 나와 다른 사람과 한 몸처럼 지내기 위해 부단히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상대를 헤아리려 한 것이 컸다.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건 보장되어 있지 않다. 다만 매 순간 최선의 결정을 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결국 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결혼준비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함께 만족하는 결과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우리의 경우에는 내가 결혼준비를 전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노력하는 과정이다. 행복한 결혼준비가 곧 행복한 결혼생활의 리허설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시작한 일이라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사람을 대하는 서비스직이자, 고객을 만들어야 하는 영업직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피로감과 어려움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늘 새로운 사람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한다는 게 더 매력적이라 견딜만하다. 실제적으로 웨딩플래너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보려 한다. 이렇게 글로도 쓰고 일로도 하고 실제로도 경험하고 있는 '결혼'은 내 인생에서 여러모로 참 큰 의미를 가지는 일생일대의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 그리고 나는 웨딩플래너에 관해 쓰는  글들로 영업을  생각은 없다.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몇 해 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관련한 글을 썼을 거다. 그저 내가  웨딩플래너를 했는지, 어떻게  일을 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적음으로써 결혼에 대한 생각과 웨딩플래너의 역할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힌트를 얻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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