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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mille Nov 06. 2024

영화<밀양>비평

가장 심도 깊은 멜로영화

낙관적 허무주의에서 사랑으로
출처:kmdb

밀양은 이창동 감독의 장편 연출작으로 아들 준을 잃게 된 여인 신애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신애는 서울에서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작은 피아노 학원을 개원한다. 사랑하는 아들 준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아들이 납치되고 신애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신애의 아들은 살해된 채 발견된다.

범인은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의 원장. 땅을 보러 다니는 등 허세를 부리며 마을 주민들과 거리를 두던 신애의 행동이 참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신애는 식음을 전폐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다 우연히 참석한 개척교회의 기도회에서 감정을 모두 쏟아내고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가 된다.


종교의 도움으로 상실감을 극복한 신애는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직접 면회를 간다.

신의 자비를 설파함과 동시에 신의 자비를 통해 범인을 용서하겠다는 신애의 의지는 이미 교도소 속에서 만난 같은 신을 통해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간증으로 산산조각 난다.

신애는 쓰러지고 이때부터 신애는 그녀가 믿는 신에 대한 반항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하며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기독교 교부들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파했다. 그런데 만일 그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 세상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니체는 그에 대한 답으로 낙관적 허무주의를 제시했다.


비록 아무 의미 없는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 살아가려는 인간의 의지를 니체는 긍정했다.

다시 밀양 얘기로 돌아가보자.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위로가 되던 종교마저 그녀를 배신했다.

그럼 그녀가 살아갈 이유는 무엇인가? 신애는 자신이 믿던 신에 대한 복수를 그 이유로 삼았다.


신애는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와 같은 십계명을 어겨가며 그녀가 믿던 신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잠자리를 가지려던 교회 장로는 그녀와 성관계를 맺기 직전 죄책감을 못 이겨 스스로 그만두고, 도둑질은 중간에 들키고 만다. 신에 대한 반항이 그녀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으나 그녀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낙관적 허무주의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좌절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좌절된 까닭은 무엇일까? 영화는 마지막 씬에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다.


자해를 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신애의 퇴원날, 그녀를 사모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종찬이 그녀를 미용실에 데려간다.

오랜만의 바깥 생활에서 만난 미용사는 다름 아닌 살인범의 딸. 운명의 장난에 화가 치밀어 오른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미용실을 뛰쳐나와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온 신애는 거울을 보며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를 따라다니던 종찬이 거울을 들어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땅을 비추는 햇빛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거울은 빛을 반사해 사물을 보여준다. 신애는 해가 내리쬐는 바깥에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햇빛은 누가 선사하는 것인가? “하나님은 햇빛 하나하나에도 계셔요.”라는 약사의 대사를 떠올리면 금세 추론할 수 있다.


밀양의 이야기 구조는 기존의 신념 체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는 구조 채택하고 있다.

아들에 대한 헌신적 사랑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신에 대한 사랑에서 인간의 의지를 긍정하는 낙관적 허무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신애가 선택한 허망한 세상을 살아가는 의지는 좌절되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우리가 허망한 세상을 살아가며 선택한 최고 의지가 좌절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은 아이러니하게 다시 사랑으로 이어진다.


등장인물 종찬은 초장부터 신애를 졸졸 따라다니며 구애한다.

그는 신애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

신애는 그를 귀찮게 여기지만 종찬은 그와 별개로 신애에게 항상 똑같은 관심을 보인다. 결말에서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거울을 들어주는 사람도 종찬이다. 삶에 대한 의지가 모두 꺾인 신애에게 유일하게 남은 존재는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이웃, 종찬이다. 신애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종찬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신애가 정면으로 반박하고자 했던 십계명에 해당되는 말이다.


사랑에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멜로물의 절정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비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 아닌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까지 표현한다. 깊고 심오한 메시지를 녹여낸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후대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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