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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Oct 09. 2024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왜 탈출하지 못할까?

에릭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일명 '학습된 무기력'이란 것이 있다.

반복적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을 학습하게 되면 나중에 자신의 능력으로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음에도 극복하려고 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학습된 무력감'이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learned helplessness'라고 한다. 이는 마틴 셀리그만과 동료 연구자들이 동물을 대상으로 회피 학습을 통해 공포의 조건 형성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현상이다. 피할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환경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험으로 학습하여 이후에 실제로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거나 극복할 수 있으면서도 그런 상황에서 회피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현상을 뜻한다. -출처 : 나무위키-

종종 학습된 무기력은 서커스단의 코끼리에 비유하곤 한다. 아기 코끼리를 잡아 쇠사슬로 다리를 채워 튼튼한 말뚝에 묶어 놓으면, 어른 코끼리가 되어서도 자기 힘으로 충분히 도망칠 수 있음에도, 어린 시절 학습된 무기력 때문에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유튜브에서 긴 코로 붓을 잡아 벽에 그림까지 그리는 코끼리를 보고 이 말은 새빨간 거짓말임을 알았다. 코끼리는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보다 뛰어난 동물이다.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좋게 포장하면 무기력은 또 다른 쉼이라 생각한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달리는 우리 인간이 그나마 번아웃되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은 가끔 또는 자주 무기력에 빠지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짐, 즉 '틈'이 생겨 비로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이다.


무기력은 우울감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상태는 아니다. 학교에서 무기력에 빠진 학생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냥 귀찮아서', '그냥 하기 싫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은 그나마 괜찮다. 이런 무기력에 빠진 학생은 기다리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무기력은 우울감과 상실감과 함께 오는 무기력이다. 학교폭력이나 가정불화, 심리 정서적 위기 등 청소년기에 감당할 수 없는 이러한 무기력은 우리 아이들을 심각한 상황에 빠뜨릴 수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피고 보살펴야 한다.




에릭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소유냐 존재냐' 등을 쓴 작가로 수능 세대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왜냐하면 그의 책은 수능 국어 영역 제시문에 자주 나왔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는 '에릭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로, 1930년대 에릭프롬의 글들을 엮은 작은 에세이집이다.


<차례>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라는 에세이에서는 인간의 속성을 상수와 변수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정의한다. 상수는 인간의 변치 않는 본성이고, 변수는 새로운 업적과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가변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생각하건대 인간의 본질은 '질문'이다(상수). 이 본질 때문에 인간은 창의성과 진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변수)가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인류가 존재한 이후 인간에게는 변치 않고 동일하게 남는 것, 즉 본성이 있다(상수). 하지만 인간에게는 새로운 업적, 창의성, 생산성, 진보를 가능케 하는 다수의 가변적 요인이 있다(변수). 진보는 물질적으로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꾸준한 성장을 말한다."




에릭프롬은 무기력의 유형에 대해 말한다.

먼저 존재 자체에 대한 무기력이다. 나만 내 존재를 인식할 뿐 타인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 프롬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신경증 환자의 무기력에 비유한다.


다음은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전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인간을 향한 무기력이다. 프롬은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다."라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만든 기계에 종속되고 통제할 수 없는 무기력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물질이 주인이 되고 인간이 노예가 되는 기술발달이 가져온 무기력이다. 1930년 대 그들이 겪는 상황이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프롬의 통찰이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에 경의롭기까지 한다.


"인간이 지금처럼 이 정도로 물질세계의 주인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가장 우수하고 가장 멋진 사물들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 창조물이 낯설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그와 반목하는 것이다. 사물이 완성되면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정하는 거대한 기계의 괴물이 된다. .... 인간을 위해 만든 물질세계가 오히려 현대인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프롬은 무기력에 빠지면 부당한 압력에 자신을 지키지 못하며 모든 것을 수용하게 되고, 급기야는 이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프롬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 무기력한 태도를 지닌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력감은 공격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부당하 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난과 비판을 그냥 감수하고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때론 부당하다는 사실, 비난당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것이 바로 서커스단의 코끼리가 탈출을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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