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 박태식, 박현도, 『신학의 식탁』
지난 8월 15일, 광화문에서는 보수 개신교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집회가 있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었지만, 한국은 K방역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코로나 대응에 성공적으로 대처하고 있었던 중입니다. 하지만 8월 15일 광화문 집회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엔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목사와 신도들 사이에 다수의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개신교계에 코로나 방역을 위한 적극 적인 동참을 요구하고, 당분간의 비대면 예배도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부와 보건당국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휴대폰을 끄고 자신들의 동선을 숨기거나, 보건당국의 연락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이러한 비대면 예배에 동참했으나 일부에서는 현장 예배를 강행하기도 했습니다. 개신교회를 박해하려고 정부에서 거짓 확진자를 양산해 낸다고 하는 주장까지도 흘러나오기도 했고요. 신앙과 정치가 오묘하게 결합되어 그들의 신념은 더욱 강해 보이기만 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정부 비판이나 정책 비판도 개인의 소중한 권리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개신교인들에게 거룩한 주일 예배 역시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이 나와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에는 잠시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쉽고 마음이 아프지만 화면 앞에 머물며, 비대면으로나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귀 기울이고,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도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하루빨리 잠식되길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밤낮으로 수고하는 의료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이웃을 위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찾아볼 수도 있겠지요. 타인의 생명과 위험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는 상식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이 빠진 맹목적인 하느님 사랑은 완전한 그리스도교 교리라고 보기도 어렵고요. 이웃과 소통하고, 이웃에 대해 귀 기울이고, 이웃과 함께하는 종교야 말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매력을 느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종교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생각할 때면 이슬람이 빠지지 않습니다. 2001년 미국 9.11 테러를 기점으로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극단주의 무장 이슬람교도들의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중동에선 IS라는 극단주의 무장단체까지 만들어지며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이슬람 혐오가 생기고 이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종교 세력은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이슬람 전체에 대한 반감도 커져버렸지요. 그런 이들에게 대화나 교류의 영역은 남아 있을까 의문이 듭니다. 또한 이슬람교 자체가 아주 폭력적이고 테러집단 같은 인상이 남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부 극단적인 세력이 그 종교 전체에 대한 인상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이번에 다룰 책은 주원준, 박태식, 박현도 세 공동저자의 『신학의 식탁: 세 종교학자가 말하는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입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 사이에 과연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갈등과 대립이 아닌 상호 간에 소통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저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저자 중 한 명인 주원준 박사는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입니다.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구약학성서언어학과 고대근동언어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서강대 신학대학원과 종교학과에서 구약성서, 히브리어, 고대 근동 종교, 유다교 등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구약성경’이 어떠한 배경에서 탄생했고, 당시 고대근동사회에서 그들의 문명과 어떻게 교류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둘째로 박태식 신부는 성공회 사제입니다. 서강대 종교학과에서 신학 석사,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제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고, 다양한 저서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신약성경’이 저술될 당시 유다교와 그리스 문화 등 신약성경이 당시 사회문화와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박현도 박사는 캐나다 매기대학교 이슬람연구소에서 이슬람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란 테헤란 대학교에서 이슬람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이슬람이나 중동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슬람 경전 ‘쿠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쿠란’이 유다교, 그리스도교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 저자는 ‘구약성경’, ‘신약성경’, ‘쿠란’이라는 각각의 경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각 경전이 당대 사회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눈을 감은 채, 귀를 닫은 채 각 경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책 1장에서는 구약성경에 대해 다룹니다. 구약성경이 쓰일 당시 고대 근동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설명하고 구약성경이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저술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다교의 경전이기도 합니다. 보통 유다교를 떠올릴 때면 그들이 가진 종교적 선민의식이 떠오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이들은 오직 유다교뿐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 주원준 박사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민족과 문화들에 대해 비타협적이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당시 강대국인 페르시아,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와 같은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냉혹한 국제정세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한 소통과 외교, 교류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을 지켜온 나라지만, 외부의 문물에 눈과 귀를 꼭꼭 막고 살았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것은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종교를 참조하거나 서로 대화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쇄국(鎖國)은 없다.” 80쪽.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 쇄국은 없다.’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유다교 신앙이 고립되고 배타적인 태도에서 성장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양한 문화적 교류와 수용을 통해 유다교 신앙을 살찌울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책에서는 구약성경이 당시 고대 근동 문화와 어떤 영향들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됩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이 당대 고대 근동 문명과 언어, 문학, 정치, 종교, 문화, 기술, 신학과 같은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고유한 신앙을 성장시키고 지켜 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어 2장에서 ‘신약성경’에 관한 부분에서도 1장과 비슷한 관점이 견지(堅持)됩니다. 2장의 저자 박태식 신부는 신약성경이 쓰일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더불어 유다교 전통으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신약성경의 시대적 배경, 그와 관련된 역사적 맥락을 짚어냅니다. 특히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연결점, 그리고 차이점을 제시하면서 신약성경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냅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살펴봄으로 신약성경을 더욱 풍요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예수가 활동했던 당시 이스라엘은 문화적, 종교적 난맥상을 이루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하느님을 향한 길을 제시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활동했던 시절의 이스라엘은 난맥상을 이루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나 끊임없는 반란의 기운이 감돌았고 제도권 종교인들 역시 반로마 세력과 친로마 세력으로 나뉘어 반복이 심각했다. 그리고 종교적인 가르침도 매우 다양해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였다. 율법, 장로들의 전승,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와 에세네파의 율법 이해, 예언자 전통, 지혜문학, 열혈당원과 같은 극단주의, 종말-묵시사상, 헬라철학 등등... 과연 어떤 가르침을 따라야 할까? 예수는 이러한 혼란스런 상황에 등장해 야훼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231쪽.
예수는 당대 종교사회 안에 어지러워진 것들, 본질을 잃은 것들을 다시 되돌리려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황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타성에 젖어 외적이고 법적인 것들에만 신경 쓰다 보니 사랑과 자비라는 하느님의 핵심 가르침을 놓쳤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인간이 켜켜이 쌓아온 종교적 전통이 본질적인 사랑과 자비보다 더 소중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당대 종교 사회를 향해 일갈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지라고, 주변에 아파하는 이웃에게 눈을 돌리라고, 권세를 떨치는 이가 아니라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예수 이전의 유다교의 모습을 닮아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봅니다. 사랑과 자비 없는 예식과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의 고통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오로지 내 신앙행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주변과는 소통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이 종교적으로 올바르고, 다른 것들은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은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자는 외적인 타성에 젖어 타인의 말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아집만을 내세우는 종교적 분위기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빛이 났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 중에서 자신의 고집과 아집만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곧 예수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지막 3장에서는 이슬람교 경전 ‘쿠란’을 다루고 있습니다. 박현도 박사는 이슬람과 쿠란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이슬람이 받는 여러 가지 오해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합니다. 그동안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이슬람교 전체가 오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랜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에 대해 가진 오해와 편견도 한몫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이든 문화든 서로 활발한 접촉이 없으면 불필요한 오해와 환상이 쌓이기 마련이다. 믿음의 세계는 더욱 그러하다. 아니, 서로 접촉이 있더라도 자신을 보호하는 신학적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타인의 믿음은 결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적대시하던 중세 때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의도적 왜곡이 횡행한 것은 이슬람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오늘날 개화된 현대 세계에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중세 신앙 선배들이 걸어온 잘못된 길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무함마드를 욕하고 비방한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더 돋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05쪽.
저자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서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서로에 대한 무지가 오해를 일으키고, 그 오해가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자는 코란이 저술되는 배경을 설명하며 코란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받은 영향을 제시합니다. 이를 통해 같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인 이슬람은 구약과 신약 세계을 아우르는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모두 저 멀리 각각 떨어져,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근거들을 다양한 방면에서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책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모두 역사 속에서 주변 신앙 전통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랐다. 진공상태에서 툭 튀어나온 종교는 없다. … 우리가 각자 속한 신앙전통도 마찬가지다. … 나와 다른 이웃의 신앙전통도 편견을 버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의 신앙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387~388쪽.
이웃 종교를 편견 없이 볼 때 자신의 종교와 신앙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저자의 제안에 공감이 갑니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 고립된 채 살아감으로 스스로의 성장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비타협적이고 아집에 가득 찬 태도는 이웃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한 위치를 모른 채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 책의 세 명의 공동저자는 각각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쿠란이라는 다른 영역에 대해 서술하면서도 공통적인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종교도 아무런 소통이나 영향 없이 이뤄진 종교 전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모두 다양한 교류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고유하고도 독특한 신앙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주변과의 소통을 통해 각자의 더욱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부 극단주의 세력은 교류를 통한 풍요로운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각 종교 별 극단주의 성향을 지닌 세력들은 다른 이들에게 공감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소통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날 이런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사회적 종교 혐오 현상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길 바라게 됩니다. 무엇보다 오늘 다룬 책 『신학의 식탁』이라는 제목처럼 종교가 식탁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길, 그것이 각자 서로의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