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국, 『순교자』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을 ‘순교’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을 ‘순교자’라 부르지요. 죽음의 공포를 직면하면서도 신앙을 놓지 않는 용기는 가히 초월적인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선 이 순교자들을 높이 공경하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 합니다. 순교자들이 겪은 고통과 죽음 뒤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배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순교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대부분도 순교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포하기 전,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다신교를 표방하면서도 황제 숭배를 요구했던 로마 제국에선 유일신교인 그리스도교는 박해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길 수 없다는 의지와 신앙으로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후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에 퍼지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고 순교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는 그리스도교가 조선사회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여 사학(邪學), 사교(邪敎)라 불렸습니다. 이로 인해 약 만 명에서 2만 명에 이르는 분들이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워낙 무명(無名) 순교자들이 많아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조선시대가 막을 내리고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습니다만 6.25 전쟁 이후 북쪽에서는 종교인들이 탄압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 정권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쪽에 있던 종교인들은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남쪽에 내려오지 못한 종교인들은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가톨릭, 개신교 할 것 없이 말이지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순교자 대부분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만, 6,25 전쟁 때 북쪽에는 천주교뿐만 아니라 개신교인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땐 천주교인, 개신교인 모두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다룰 책은 6,25 전쟁 당시 평양을 배경으로 하여, 개신교인들의 신앙, 그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룬 소설, 김은국의 『순교자』라는 소설입니다.
저자 김은국(미국명 Richard E. Kim, 1932~2009)은 1932년 함경남도 함흥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1947년, 북쪽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남한으로 내려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칩니다. 1950년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지만 6.25 전쟁이 터져 군에 입대합니다. 제대 후엔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62년엔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창작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때 석사학위 청구 작품으로 제출한 소설이 오늘 다룰 소설 『순교자』입니다.
1964년 소설 『순교자』가 발표된 후 그는 문단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 소설은 1965년엔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Award) 최종 심사에 오르기도 했고, 1967년엔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오르는 등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또한 미국에서는 이 책이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순교자』는 6.25 전쟁 발발 당시, 평양에 있던 개신교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북한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인민군에게 12명에 목사가 살해된 것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있던 나머지 2명의 목사도 있었지만 그들만은 목숨을 건집니다. 살아남은 2명의 목사는 47살의 ‘신 목사’와 27살의 ‘한 목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젊은 ‘한 목사’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고요.
남한이 다시 평양을 수복했을 때, 평양에 들어온 육군 정보국 정보장교 ‘이 대위’를 통해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는 남다른 정의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진실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직속상관, 육군 정보국 파견대장 ‘장 대령’은 조금 달랐습니다. 국가를 위해,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민중의 마음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진실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장 대령은 북한군에 의해 희생된 12명의 목사 순교자들을 사람들에게 선전하려고 합니다. 많은 개신교인들을 고취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미군 고문관들에게도 신앙을 지킨 이들을 특별한 이들로 치켜세우는 것이 좋아 보일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대적인 합동추모예배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신 목사는 12명의 목사가 처형되는 순간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12명의 목사는 죽으면서까지 하느님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신 목사는 그들이 죽는 순간에 하느님이 없을 것이란 비탄에 젖었다는 사실을, 인민군들에게 살려달라는 애원을 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신 목사는 이러한 ‘진실’에 입을 다뭅니다. 오히려 그는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신자’, ‘유다’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야유와 비난에도 그는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명예와 사람들의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장 대령은 신앙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신 목사는 교회의 명예와 남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위로하기 위해 합동추모예배를 준비하고 진행했습니다. 소설 속 화자 이 대위는 진실을 가리는 이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체제 순응적인 장 대령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심이 깊고, 사람 됨됨이가 존경받을만한 신 목사까지도 진실을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대위는 이러한 모습에서 인간의 고통과 그에 대한 위로, 어둠 안에서의 희망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게 됩니다.
살해당한 12명의 목사 중 가장 명망 있있던 박 목사의 아들은 이 대위의 친구 박 대위입니다. 박 대위는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자로 여기고 신앙을 갖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연도 끊은 상태였고요. 그는 이 대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아버지가 순교자가 아니었으면 하고 열심히 희망했었다는 거. 자네는 알고 있나? 난 그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 꺾이고 실패하길 바랐던 거야. 그가 최후 순간에 가서 패배하고, 납작하게 부서지길 바랐어. 영혼이 약하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도 한번 느끼게 말야. 의심한다는 것, 자기의 신과 신앙과 기타 모든 걸 의심해본다는 것이 어떤 건가를 그가 딱 한 번만이라도 느껴보고 자기 인생의 무서운 불의와 공포를 한 번쯤 맛본 다음 죽어가게 말야.” 157쪽.
이와 같은 박 대위의 말이 꼭 아버지를 향한 비난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신념을 의심하고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에게 내뱉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박 대위는 신앙이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신념에 대한 불신이 그를 언제나 괴롭혀 왔습니다.
자신의 신념이 자기 자신에게 의심받는다는 건 사실 무서운 일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옳은 것인지. 여태 내가 해왔던 선택들이 옳은 선택들이었는지 되돌아볼 때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 끝에서 내가 후회하지 않을까, 허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고요. 어느 면에선 자기가 믿는 신념과 행동에 분명한 확신과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명확한 정답이 없는 우리의 ‘삶’에서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 의심, 두려움과 같은 느낌들은 쉬이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껴안고 살아가지만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옳은 것들을 선택해나가려고 하지요. 박 목사의 아들 박 대위는 보통 사람의 의식, 불확실성과 두려움, 의심에 던져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조건 확신으로 가득 차 보이는 아버지, 박 목사의 삶의 태도가 광신적으로 보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였기에 아버지를 가까이 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박 대위는 아버지 역시 마지막엔 하느님을 찾지 못했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아버지의 나약함을 듣고 박 대위 역시 합동추모예배의 유가족 대표로 참여합니다. 그 역시 전쟁통에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근근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이 대위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진실을 은폐하면서까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그는 친구 박 대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 사람들을 속여야 하나? 이미 수없이 속고 속아온 사람들을 무엇 때문에 또 속이는 거야? 그들의 비참한 생에 어쩌자고 거짓말까지 보태는 거냔 말야? … 자네들이 그러는 건 선전을 위해서, 교회를 악명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야.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국가는 그들의 운명을 진지하게 걱정해주고 있고 그러니 만사 괜찮아질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지. … 그동안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고난에 시달리고 여전히 죽어가란 말이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속고 기만당한 채?” 213쪽.
이 대위의 말을 들으니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위안을 줄 뿐, 실제적인 고통과 억압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불의와 억압을 그저 신의의 위로로 덮어버리는 위험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입니다. 소설 속 이 대위는 많은 민중이 안 그래도 전쟁이라는 위협과 고통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종교까지도 그들에게 사실을 은폐한 채 위로를 주려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희망’을 필요로 합니다. ‘희망’이 있기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고, ‘희망’으로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명의 목사가 처형당할 때 신 목사만큼은 끝까지 신앙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원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운명은 그런 신 목사는 목숨을 건지게 했고, 12명의 목사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 목사는 순교자들 중에서 살아남았단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난과 야유를 받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고, 12명의 목사가 죽으면서까지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증언합니다. 이 대위는 그런 신 목사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희망이라는 환상을 준단 말입니까? 무덤 이후의, 죽음 이후에 대한 환상을 주란 말입니까?”
이에 신 목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소!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이오. 절망은 이 피곤한 생의 질병이오. 무의미한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삶의 질병입니다.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이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255쪽.
보통 ‘믿음’의 반대말을 제시하라고 하면 ‘불신’ 정도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어느 책에서 본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절망이다.’ 믿음이란 일종의 희망과도 같습니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결정적인 자신의 기대를 건다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대가 없기에 희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되는 의미는 ‘절망’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절망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믿기 힘들뿐더러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인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 목사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들이 절망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순교자들의 굳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순교했다는 사실이 절망과 고통 안에 놓인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해당한 12명의 목사들이 끝까지 하느님을 증언했다고 설교합니다.
합동추모예배가 끝나고 많은 것들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신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인들은 12명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전쟁과 가난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굳음 믿음을 키워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한의 전선은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보장교였던 이 대위는 한국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할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그래서 신 목사에게 사람들과 함께 피난 갈 것을 요청합니다. 목사가 평양에 그대로 남았다간 인민군에 의해 고초를 겪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 목사는 이 대위의 청을 거절합니다. 평양에 남겠다고 말입니다.
“저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얘기해주십시오.” 나는 말했다. “우리가 지금 이기고 있지 않다는 얘길 해주십시오. 평양을 사수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모두 알고 있소.”
“알고 있다면 왜들 떠나지 않는 겁니까?”
“간들 어디까지 갈 수 있겠소? 그들이 그 고통을 얼마 동안이나 견디어내겠소? 젊은 사람들은 이미 떠났소. 그러나 노약자와 아녀자들은 떠날 수가 없소. 그들은 너무 약해요.”
“목사님은요?”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래 줄 사람이 없다면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잘 가시오. 대위.” 283쪽.
신 목사는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하며 평양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신 목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희망을 주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남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0)
예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돌아가셨습니다. 죄 안에서 허덕이는 인간을 가엾이 보시고, 인간과 함께 하시면서 종국엔 죽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신 목사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두려움 앞에 놓인 사람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확신입니다.
소설 『순교자』는 인간의 절망과 희망, 신앙과 양심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인간의 용기를 포착해냅니다. 과연 종교가 인간에게 주는 희망은 무엇일지. 신앙이 인간에게 주는 용기란 무엇일지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것에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모두가 나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분명한 신념을 좇습니다. 조금씩 다 다르지만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진리를 찾고, 인간의 품위를 잃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매일을 소비하는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며 비틀거리다가도, 희망으로 내일의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기억해봅니다. 실패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성장해나가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소설 『순교자』를 통해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