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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Nov 10. 2020

[서평]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토머스 머튼, 『칠층산』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修道院)에 들어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보낸다는 것.

  이러한 생활은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매일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더욱 꿈만 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침묵과 고독을 견디며 봉쇄된 곳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소수의 이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누군가는 하느님께 완전히 매료되어 수도원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수도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당신을 찬미하는 길로 이끄시는지를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칠층산』을 통해 엿보고자 합니다.


  토머스 머튼은 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규칙이 엄격하다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자입니다. 가톨릭교회에는 많은 수도회가 있습니다. 수도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활동 수도회'이고 다른 하나는 '관상 수도회'입니다.  '활동 수도회'는 교육사업이라든지, 복지사업, 자선사업, 그리고 선교사업에 이르기까지 세상 안에서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전합니다.  이와 달리 '관상 수도회'는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따로 외딴곳에 모여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갑니다. 토머스 머튼은 관상 수도회 중에서도 엄격한 규율로 살아가는 것으로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자입니다.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의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2019년 KBS에서 제작된 『세상 끝의 집,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라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봉쇄수도원 카르투시오』(2020년 11월 19일 개봉 예정)를 통해 보실 수도 있습니다.


  토머스 머튼에겐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가’, 혹은 ‘현대의 영적 스승’라는 수식어가 붙곤 합니다. 그의 영성과 사상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그의 다양한 영성 서적은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안내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중 그를 처음 세상의 알린 작품이자, 그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봉쇄수도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신앙 자서전 『칠층산』은 우리에게 토머스 머튼의 삶과 신앙을 이해하는 단초를 놓아줄 것입니다.


  먼저 책의 제목인 『칠층산』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칠층산’이라는 단어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2부인 ‘연옥편’에 대한 묘사에서 나옵니다. 연옥은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했으나, 자신의 죄를 통찰하고 뉘우치면서 자신을 정화시키는 곳이지요. 작품 속 여행자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따라 연옥에 갑니다. 여기서 연옥의 구조는 일곱 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데, 각 층은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색욕이라는 일곱 개의 대죄로 각각 할당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일곱 가지의 대죄를 ‘칠죄종’(七罪宗)이라 일컬으며 인간이 짓는 죄의 근원으로 봅니다.

  토머스 머튼은 수도원에 이르기까지의 자신의 삶을 연옥과 같은 정화의 기간으로 보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과거에서부터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현재까지의 삶의 과정을 '칠층산'이란 제목을 달았을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1915년, 뉴질랜드 출신 영국인이자 화가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랑스의 프라드라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튼의 가족은 미국 뉴욕주 남부에 위치한 롱아일랜드로 거처를 옮깁니다. 머튼이 여섯 살 되던 해엔 그의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럼에도 머튼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자신이 부모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으며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한테서는 사물을 바로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한테서는 혼잡한 세상에 만족하지 않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부모한테서 일하고 관찰하며 즐기고 표현하는 훌륭한 능력을 물려받은 것이다. … 젖먹이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영적 백만장자임에 틀림없다.” 33쪽.


  어머니의 죽음 이후 1926년 머튼과 그의 동생은 이후 화가인 아버지를 따라 다시 프랑스로 떠나, 생탕토냉이라는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성장하며 프랑스의 문화와 언어를 익힙니다. 머튼은 분명하고 선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라는 문화 안에서 점차 종교적 감수성을 일깨워 나갑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의 문화유적, 유려한 대성당, 수도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독방에서 살았을까? 그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모른다. 나는 수도 성소나 수도 규칙에 대해서는 아무런 호기심도 없었다. 다만 그 외딴 계곡의 공기를 마시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뿐이다. 나는 그 책에 나오는 아름다운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그 모든 장소에 한꺼번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속상하고 섭섭했는지 모른다.” 111쪽.


  머튼의 마음속엔 아직 구체적인 신앙의 빛이 깃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당들과 수도원들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며 ‘외딴 계곡의 공기를 마시고 침묵에 귀 기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아름다운 장소에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을 인식하기 이전에도 이미 당신을 향해, 초월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존재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이 존엄성을 갖는 이유를 하느님을 향해, 초월을 향해 열려 있는 인간 본성에서부터 찾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 19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어떠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인식하고 접하게 되던, 인간이란 자신의 양심과 의지를 바탕으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엄한 자연을 통해서나, 그리스도교적 문화유산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종교적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초월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존재로서 세상에서 신앙의 편린(片鱗)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점차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후 1929년에 머튼은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가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그는 영국에 있는 오컴 학교를 다니며 보다 안정적인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머튼은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을 거치며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냅니다. 이 시간을 통해 그는 지성적으로, 감성적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또한 영국에서 다양한 문학과 사회사상에 매료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교적 감수성이 막혀버린 시기이기도 하지요. 머튼은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하여간에 한마디로 말해 그때 내 영혼은 죽어 있었다. 백지요 무(無)였다. 초자연적인 면에 관한 한 내 영혼은 텅 비어 있는, 이를테면 영적 진공상태였다. 자연적 능력 면에서도 당연히 발휘되어야 할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221쪽.

  또한

  “수도자와 수도원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부와 쾌락이 가득 찬 세계가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어서 무엇이든지 내 것이 될 수 있고 내 지성과 예민한 오관으로 그 모든 보물 상자를 몽땅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쉬울 게 없다. 마음에 드는 것은 갖고 안 드는 것은 버리면 그만이다. 또 나는 만물의 주인이니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내 멋대로 못쓰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227쪽


  오늘날에 많은 신앙인들이 『칠층산』에 매료되는 이유 중 하나가 머튼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하느님을 배척하는 이유, 신앙의 무관심한 내적 상태가 머튼의 글을 통해 전해집니다. 이 시절 머튼에겐 신성(神性)이나 초월성 같은 것들을 구닥다리이자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 어떠한 종교적 감수성조차 허락할 수 없을 만큼 내적으로 메말라 있기도 했습니다. 이랬던 그가 극기와 고난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즐겨 받아들이는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일원이된다는 것은 하느님 은총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머튼은 오컴 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진정한 기쁨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합니다. 심지어는 그때 한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갖게 됩니다. 그 여인과 아이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칠층산』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독자에게 알리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토록 머튼은 당시 참담하고도 방황하는 시기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고는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곳에서도 영적으로는 방황하지만 외적으로는 열정적인 생활을 해나갑니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시와 소설을 쓰기도 했고, 대학 잡지 편집자로서 활동하기도 합니다. 또한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공산주의 활동을 함께 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는 그때, 마음을 나누고 배려를 나누는 절친한 친구들을 사귀고, 훗날 영적인 도움과 격려를 해줄 교수들을 만나게 되는 등, 수도자를 향한 그의 길에 조금씩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머튼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던 시기, 아주 우연한 기회에 구입한 한 권의 책이 그의 신앙의 처음으로 경종을 울립니다. 에티엔 질송(Étienne Gilson, 1884~1978)의 『중세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머튼은 이 책의 내용을 모른 채 구입하고는, 이 책 표지에 ‘교회인가’라는 글자를 보고는 ‘분노’의 감정까지도 느낄정도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책을 버리지 않고 읽은 사실 자체가 ‘확실한 은총’이라고 말할 정도로 말입니다.(363쪽)

  머튼은 그 책을 통해 ‘하느님’, 곧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신이라는 개념을 닫순히 미신적인 유물로써가 아니라, 깊고도 명확한 개념으로 이해 할 수 있다는 단초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처음으로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고(370쪽) 다른 그리스도교 서적을 접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신앙의 감수성에 눈을 뜨고는 일상에서도 신앙을 체험하는 의미를 깨닫습니다.


  “무릇 인간의 구원은 자연적이며 일상적인 수준에서 시작된다. 내 경우 역시 그러했다. 책, 이념, 시, 소설, 그림, 음악, 건물, 도시, 장소, 철학 같은 것이 은총이 작용할 수 있는 재료 역할을 해주었다. … 은총이 작용하는 바탕은 그저 우리의 우정과 연대의식이었다. 은총은 우리가 서로의 이상과 비참함, 골칫거리와 복잡한 심정, 두려움과 어려움과 소망을 털어놓으며 술을 마시고 취하기도 하는 가운데 작용했다.” 376쪽.


  우리가 ‘신앙을 체험했다.’하고 말한다면 그 장소는 어디가 될 수 있을까요? 오직 ‘성당’, 혹은 ‘교회’라고 불리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건물 안에서만 신앙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러한 외적인 건물 ‘안에서만’ 신앙을 체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하고 신앙을 체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전체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무대이니까요.

  머튼의 말대로 우리는 다양한 것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도, 경이로운 자연을 통해서도, 마음을 울리는 문학, 음악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열린 마음, 하느님의 은총을 긍정하는 태도에서 가능합니다. 닫힌 마음이나 닫힌 사고를 통해서는 은총을 인식하기 어렵습니다. 머튼은 점차 하느님을 향한 개방된 마음으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많은 관계들과 다양한 체험 안에서 은총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후 머튼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신앙 서적을 탐독한 결과 1938년, 23살이 된 해에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뒤 문학 석사학위를 준비하면서 시나 소설을 쓰기도 하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사제’의 꿈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식물이 햇빛 속에 잎사귀를 펴듯이, 넓고 깊은 고독에 잠겨 하느님 눈길 아래 파묻히는 삶이었다. 그러려면 나를 세상에서 격리하고 하느님과 일치 안에서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규칙이 필요할 뿐,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해 싸우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규칙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사정을 하루아침에 터득하지는 못했다.” 536~537쪽.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가톨릭교회에는 다양한 수도회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와 복음을 전하는 활동 수도회가 있는 반면 봉쇄된 구역에서 세상과는 단절된 채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밀접하게 세상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교구 사제도 있고요. 머튼은 아직 이 여러 갈래의 길 중에 분명한 길을 정하진 않았으나, 고요한 상태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은 열망을 키우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머튼은 성소의 여러 길목에서 점차 신앙에 대한 확신,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갖고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할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도회에 들어갈 입회절차를 밟습니다. 그러나 입회 직전 머튼은 과거 자신의 과오를 수도원에 고백합니다. 이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는 입회를 거부당합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여 자신의 신앙을 다치게 하거나, 신앙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계속 속세에 남아 있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나에게 독을 먹이려는 삶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에 등을 돌려야 한다. 하느님은 내가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수도자 비슷하게 사는 성소는 허락하실 것이다. 비록 내가 수도자가 못 되고 사제가 될 수 없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여전히 내가 사제나 수도자와 비슷하게 살기를 바라실 것이다.” 614~615쪽.


  머튼의 이 말은 수도자나 사제의 삶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자리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라는 것을,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는 그 자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며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신앙의 삶일 것입니다. 머튼은 수도자로서의 삶을 거부당했지만 결코 소중한 신앙을 함부로 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로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느님의 말씀과 신앙 안에 머무르려 한 것입니다.


  머튼은 신앙을 간직한 채 박사학위 준비를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소개를 받아 성주간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보내면서 관상 수도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됩니다. 또한 대학에서의 특별 강연을 듣고서는 할렘에서 빈민들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단체를 알게 되기도 합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16~21)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가장 가난한 곳에 투신하려고 마음을 먹기도 합니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다짐했습니다.


  “할렘에 간다면 적어도 나는 하느님께서 날마다 주시는 것을 먹으면서 과거도 미래도 없이 비참한 빈민굴 셋방에서 병들고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 세상에서 추방된 이들, 멸시받는 이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곳이 내가 몸담아야 할 곳이라면 하느님은 늦기 전에 분명하게 알려주실 것이다.” 729쪽.


  머튼은 신앙을 위해 가만히 하늘만 바라보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을 느꼈고, 가난하고 비참한 곳에 계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비천한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가장 낮은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도 그는 온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머튼은 할렘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준비까지 하지만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향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향한 열망이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머튼을 잘 알던 은사이자 당시 영적인 동반자였던 마크 밴 도런 교수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눕니다.


  “자네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되었나? 다시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나는 그저 애매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여보게, 내가 그 점에 대해 잘 아는 분께 의논했더니, 자네가 성소가 없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그 사실이 바로 자네한테 성소가 있다는 증표일지도 모른다는 것일세.” 734쪽.


  나의 욕심대로, 나의 욕망대로 모든 것을 재단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 이러한 마음이야 말로 깊은 신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을 통해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비춰주실 것이란 확신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겸손의 자리의 은총의 빛이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에 머튼은 다시 용기를 얻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편지를 보내 입회 의사를 밝힙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과 함께 하느님께서 자신을 수도자로 받아주시길 바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켄터키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다음과 같은 느낌이었다고 밝힙니다.


  “나는 자유로웠다. 나는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했다.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은 이 지상의 온갖 불안과 걱정과 비애, 그리고 사물에 대한 애착에서 해방되어 자유롭다는 뜻이다. 일단 삶이 하느님께 속하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장소나 복장의 차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컨대 자기 자신과 의지를 본질적으로 봉헌하는 희생이 있느냐 없냐가 문제일 뿐이지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다.” 750쪽.

  머튼은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 채 수도원으로 향합니다. 개인의 욕심, 욕망을 말 그대로 버리고 무언가를 행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개인의 욕망이 뒤섞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원의(原意)나 바람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참으로 쉽지 않은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머튼의 고백을 곱씹어보며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각자에게 바라시는 바를 안배해주실 것이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머튼은 이후 트라피스트에서 입회 절차를 거쳐 입회 허가를 받고 마침내 수도자로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제 그는 침묵과 고독, 노동과 기도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에게 관상의 삶이 시작됩니다.


  『칠층산』은 토머스 머튼이 태어나서부터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기까지의 신앙 자서전입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신앙에로의 회심을 『칠층산』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것이 무엇일까,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 되돌아보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잡다하고 복잡한 것이 뒤얽힌 세상을 만족하며 살아가면서도 한쪽 마음속엔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채우지 못한 공허함이 방황을 만들기도 하고요. 머튼은 그 공허함의 자리가 바로 하느님 은총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향한 열망에 자신을 투신한 것입니다.   

  『칠층산』에서 밝히고 있는 머튼의 신앙 고백은 마음 한편에 공허함을 지닌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적으로 자신을 열어놓을 때,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빛이 마음속 공허한 부분을 채워줄 것이란 희망을 갖습니다. 세상에서 얻는 욕망이나 이기적인 욕구를 잠시 비워둘 때 그 자리에 스며드는 은총의 평화를 바래봅니다. 다음과 같은 머튼의 신앙 고백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은총으로 하느님을 만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질은 인간의 감관이나 이성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까닭에 어둠 속에서 하느님의 실재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신앙은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데 아무런 힘도 들지 않게 한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계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 그 계시는 인간의 입을 통해 온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8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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