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말구 Nov 18. 2020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톨스토이, 『부활』

  누군가 제게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톨스토이의 『부활』을 꼽습니다. 『부활』이라는 작품만큼, 성경이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신앙의 의미를 세련되고도 명료하게 담고 있는 문학작품이 또 있을까 싶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에는 많은 교리들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철학과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 교리가 완성되어 왔고, 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항목의 교리들을 열거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향하고 있는 것은 단순합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0~31)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막상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해 들을 때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곤 합니다. 너무 자주 듣는 말이라서 그럴까요? 하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명제를 현실에 적용해보자면, 결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의 의미를 오로지 하느님께만 둘 수 있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많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나에게 치명적 상처를 남긴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지,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현실에 적용해보면, 도무지 현실에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이상적인 말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적게는 전 세계 인구의 1/4, 많게는 1/3 정도라고 합니다. 약 20억 명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수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그리스도교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전념할까요? 안타깝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아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전념했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부터가 떳떳하지도 못한 처지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전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악습을 버리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길이 분명 어려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루카 5,38~39)


  묵은 것에 안주하는 사람은 새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한다는 것은 나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선 노력과 고통이 수반되는 법이지요. 우리가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편안함에 안주하는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 사람으로 변함으로 비로소 부활한다는 의미를 톨스토이의 작품 『부활』을 통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는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의 삶과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특히 그는 그의 삶 안에서 복음을 실천하며 복음의 가치를 문학에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레흐 톨스토이 (출처: pixabay.com)

  톨스토이는 영지와 농노를 가진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방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색과 도박에 빠진 채로도 살았고, 그로 인해 유산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도 방황했던 시절이 있는데, 폭압적인 러시아의 정치와 세속적인 교회의 모습 등에 환멸을 느꼈을 때 였습니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방황으로 하여금 그는 자살까지도 시도하게 됩니다.

  다행히 그는 그 시간을 이겨내고 각성합니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교 복음대로 삶을 살아가려 했고, 온갖 착취에 내몰린 농민의 편이 되기도 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기득권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민중의 삶과 함께 하고자 한 것이지요. 빈껍데기의 삶을 걷어내고 정신적이고 내적인 풍요를 찾으며 살아가려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의 자전적 요소가 함께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부활』의 주인공은 ‘젊고 부자인 데다가 공작’(18p)인 네흘류도프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고모 댁에 방문하여 그 집에서 일을 하는 카츄샤라는 소녀를 만납니다. 고모댁에서 카츄샤를 만난 네흘류도프는 그녀의 맑은 모습에 사랑을 느낍니다. 카츄사도 네흘류도프에게 사랑을 느꼈고요. 하지만 네흘류도프는 시간이 지나 향락적인 생활을 접한 뒤, 다시 카츄사를 만났을 때 그녀를 일방적으로 범하고 맙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에 100 루블을 쥐어준 채 떠납니다. 카츄샤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네흘류도프로부터 받은 치욕 때문에 그 집에서 나와 버립니다. 네흘류도프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그녀를 잊은 채, 귀족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카츄샤는 절망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녀는 인간이란 존재에 환멸을 느끼며 살아가며 결국엔 시내 유곽에서 자신의 몸을 팔며 자신의 영혼까지도 팔아버리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이후 안타깝게도 그녀는 어느 부부의 계략에 빠져 어느 부자를 살해하고 그의 돈을 갈취했다는 혐의에 빠져 징역형과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하고 맙니다. 이때 네흘류도프는 그 법정의 배심원이었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비참하게 되어버린 그녀를 알아보고,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는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한 영혼을 파괴했다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그는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합니다.     

  『부활』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법정에서 카츄샤를 마주하고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 과정, 2부는 네흘류도프가 억울한 혐의로 유배형에 처한 카츄샤를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동안 자신이 누려왔던 세계에 환멸을 느끼는 과정, 3부는 네흘류도프가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시베리아로 떠나는 카츄샤를 따라가며 유형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 이렇게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현재 그에게 토지 말고는 생계 수단이 전혀 없었다. 관료생활을 하고 싶지도 않은 데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화려한 생활 습관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미 그에게는 젊은 시절 가졌던 신념의 힘이라든가 각오,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공명심이나 욕망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전 생각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젊은 시절 스펜서의 『사회정학』을 통해 도출한 토지 사유의 부당함에 대한 명확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을, 그리고 훨씬 나중에 헨리 조지의 저작들에서 재차 확신한 그 결론을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1권 31p.


  네흘류도프는 젊은 시절, 순수하면서도 불공정하고 사회체제의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귀족적이고 안락한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저 안주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신념, 곧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나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와 같은 인물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반대하는 명제에 감명을 받고, 대지주에 비해 농민과 농노들은 너무나도 취약하고, 착취와 가난에 내몰려 있다는 현실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지만 자신 앞에 놓인 유산을 보고는 선뜻 내어놓을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실천으로 옮기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네흘류도프의 모습에서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1~22)


  자신의 신념과 이상은 옳고, 높은 곳에 있는데, 현실의 여러 가지 것들이 우리를 망설이게 하곤 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놓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심 때문일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카 6,20)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네흘류도프와 같이 우리도 자신이 가진 이상과 신념이 있지만 내가 가진 ‘무엇’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한쪽 발은 이상으로, 한쪽 발은 현실로 내딛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려는 것이 꼭 자기 자신만의 탓일까요? 이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과 사회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뒤섞여있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네흘류도프가 순수한 청년에서 세상의 가치를 좇는 향락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계기는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이 모든 끔찍한 변화는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신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쉽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동물적 자아를 따르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그 반대편에 서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타인을 신뢰하며 산다는 것은 그저 남들이 정해주는 대로 산다는 것, 자신의 정신적 자아를 거스르고 동물적 자아의 편에 선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었으며, 자신을 신뢰하며 살 때는 항상 타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타인을 신뢰하기 시작하니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다. 1권 78p.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인간의 내면을 ‘정신적 자아’와 ‘동물적 자아’로 구분합니다. 톨스토이는 동물적 자아로 살아갈 때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꼬집습니다. 반대로 복음적 신념이나 선한 내면의 가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편하게 만든다고 배척받습니다. 우리도 그저 입버릇처럼 ‘편한 게 편한 거지’라고 말하며, 또는 ‘남까지 생각하면서 머리 복잡할 것 없이 그저 내가 편히 살면 그만이지’하며 편할 길로, 동물적 자아가 이끄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정신적 자아’는 ‘복음적 자아’라는 말과 치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자아', 혹은 '복음적 자아'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처지, 공정과 정의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길이 어렵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역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지요. 참된 자아의 길은 결국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과 같음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타락한 여인으로 변한 카츄샤를 법정에서 본 후,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과거에 그녀에게 저질렀던 죄를 깨닫고 비로소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더불어 자신이 얼마나 향락과 사치에 젖어있었으며, 내면의 정화에 무관심했는지도 깨닫습니다. 네흘류도프는 어렸을 때 순수했던 자신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며 경악합니다.


  그 차이가 너무나 크고 또 너무 심하게 더러워져 있어. 처음에는 정화의 가능성 자체를 단념해버리고 싶었다. ‘나아지려고 안 해본 게 아닌데 달리진 게 없잖아. 한 번 더 해본다고 뭐 나아지겠어?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남들도 똑같아.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마음속에서 악마가 이렇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자체로 진실하고 강력하고 영원한, 자유로운 정신적인 존재가 네흘류도프 안에서 이미 깨어나고 있었다.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얽매고 있는 이 거짓을 깨부수고 말리라.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행하리라.’ 1권 160p


  네흘류도프는 용기를 내어 감옥에 갇힌 카츄샤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자신이 도움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캬츄사는 냉담하기만 합니다. 그녀에겐 네흘류도프를 용서할 마음이 없었을뿐더러, 이미 망가지고 타락한 자기 자신에 대한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서라도 카츄사를 구해내고,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의 양심과 내면의 정화의 길로 들어선 네흘류도프는 이전에 자신의 안락하고 사치스러웠던 삶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누려오던 삶이 약자에 대한 착취와 그들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카츄샤를 만나러 감옥을 오가면서 그곳에 갇힌 이들의 처참한 처지에 대해서도 눈을 뜹니다. 카츄샤처럼 억울하게 잡혀 들어온 이들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사법제도나 형벌제도에 대한 문제의식도 분명해져 갔습니다. 그의 마음속엔 점차 그가 지닌 토지를 처분할 것이고, 카츄샤에 대한 판결을 바꿀 수 없다면 시베리아까지도 그녀를 따라가 끝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출처: pixabay.com


  ‘나는 우리네 삶을 구성하는 모든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며 이해할 수도 없다. … 하느님이 만든 이 모든 사건을 이해하는 일은 내 권한 밖이다. 하지만 내 양심에 새겨진 하느님의 의지를 행하는 일은 내 권한이다. 나는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를 행할 때 나는 안식을 찾을 것이다.’ … ‘그래, 스스로를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라고 여기자.’ 이렇게 생각하자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2권 52p


  네흘류도프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니 그는 양심에 새겨진 ‘하느님의 의지’를 발견합니다. 양심을 통해 자기가 지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싶은 마음, 착취당하는 농민들의 현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의 허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1776항에서는 인간의 양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아무런 자기반성 없이 살아간다던지, 선과 악을 구분 짓지 않은 채 살아갈 때에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만한 양심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을 정화하고 싶다는 열망,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반성과 사유를 통해 양심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 하느님의 의지를 깨닫게 될 수 있음을 네흘류도프의 변화를 통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증여받은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농민들에게 처분하고, 감옥에 갇힌 억울한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귀족으로서 네흘류도프의 행동은 독특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소문이 쉽게 퍼져나갔습니다. 어느 날은 네흘류도프가 카츄샤를 비롯한 감옥에 억울하게 붙잡힌 이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그의 이모 댁에 머뭅니다. 그의 이모 역시 전직 장관의 아내이자 백작부인으로서 귀족사회 한가운데 있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많은 재산을 가졌고, 깊은 신앙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네흘류도프에게도 설교 들으러 다닐 것을 강력히 권고하기도 하지요.

  네흘류도프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감옥에 있는 억울한 이들, 비참하게 있는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런 일을 해결할만한 권력가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녀는 네흘류도프의 부탁을 들어준다면서도 그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여자죄수에 관해서도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 여자는 몇 개월째 수감 중인데 왜 그런지 아무도 몰라요.”

  “그럴 리가. 아마 그 여자 자신은 이유를 알게다. 당사자는 다 알기 마련이거든. 단발머리들은 그럴 만하니까 갇히는 거야.”

  “그럴 만한지 안 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거죠. 이모님은 기독교인에 복음서도 믿으시면서 너무 냉정하시네요...”

  “그건 다른 문제야. 복음서는 복음서고 혐오스러운 건 혐오스러운 거니까. 내가 혐오스러워 참을 수 없는데도 허무주의자들, 그것도 단발머리 여자 허무주의자들을 사랑하는 척한다면 그게 더 나쁜 거야.” 2권 89~90p


  성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9~14)


  불쌍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모에게 네흘류도프가 신앙인이면서 너무 냉정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그녀는 ‘복음서는 복음서고, 혐오스러운 건 혐오스러운 거야’라고 일갈합니다. 일상과 신앙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것이지요. 마치 앞에 제시한 성경구절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이웃이 처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들의 처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의로움을 뽐내는 것이 자신의 신앙의 전부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가슴을 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청하는 세리가 구원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처: pixabay.com

  우리 주변에도 ‘신앙 따로, 삶 따로’의 태도가 얼마나 많은지요. 성당과 교회에 나가서는 온갖 거룩한 표양을 취하면서도 다시 밖으로 나와서는 자신의 욕심에만 골몰합니다. 이웃의 아픔이나 어려움은 관심 밖이지요. 가끔씩 적선을 하면서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그들을 불쌍해하면서, 그들을 마치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도구처럼 여기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 봅니다.  


  카츄샤를 감옥에서 석방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네흘류도프는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시베리아로 떠나기 전 유일한 남매인 누이를 만납니다. 네흘류도프는 어린 시절부터 내내 누이를 사랑해왔습니다. 하지만 세속적인 남편을 만나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듯한 누이에게 실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카츄샤를 돕는 이유를 설명하는데도 누이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 둘의 대화에서 네흘류도프가 이제 완전히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넌  정말 그런 삶을 살아온 여자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나탈리야 이바노브나가 물었다. …

  “난 그녀를 바로잡으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바로잡고 싶은 거예요.” 그가 대답했다. 2권 192p


  네흘류도프가 처음 시작한 일은 카츄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과정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빛을 비추는 과정임을 깨달아갔습니다. 그녀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지난날 허위와 위선에 가득 찬 생활에서 벗어나 진실한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베푸는 선의와 호혜가 그 상대를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행은 그 선행을 행하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더 큰 빛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가 상대방을 위해 필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용서의 빛은 용서를 하는 자기 자신에게 더 큰 평화를 가져옵니다. 누이와 네흘류도프의 대화를 통해 이웃 사랑이나 용서가 남에게 더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은 착각이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사랑의 행위는 내 양심과 내면의 빛을 비추는 길인 것입니다.    


  네흘류도프는 카츄샤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 길을 떠나면서 많은 수감자들과도 연을 맺습니다. 그는 그가 영위하던 안락한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에서 오히려 깊은 인간관계를 맺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느낍니다.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수감자들과 함께 겪고, 해결해 나가며 그는 더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카츄샤에 대한 감정조차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네흘류도프는 그녀에 대해 예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처음에 느꼈던 시적인 매혹과는 전혀 달랐고 그다음에 느꼈던 육체적 탐닉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으며 … 지금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감동이라는 아주 소박한 정서였다. … 이제 네흘류도프는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이 연민과 감동을 보편적 정서로 넓혀나갔다. 비단 카츄샤뿐 아니라 모든 타인을 대할 때 그러했다.” 2권 281p


  네흘류도프의 사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점차 공동체적인 차원으로 넓혀집니다. 사랑의 범위가 점차 확대된다는 것은 내면의 성장의 반증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은 공동선과 연대를 불러옵니다. 주변의 것들을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태도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총화(總和)를 이루려는 태도가 사랑의 확장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랑이라 할지라도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사랑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선을 그어 놓고 그 안에 있는 것만을 사랑하려는 태도는 불완전한 사랑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원 역사의 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선택”(32항)된 우리는 “인류가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 사랑이 율법이 완성”(32항)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네흘류도프가 전에는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성경을 펴 들고 예수님의 뜻을 깨달으며 내용이 마무리됩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 책의 주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네흘류도프는 이 구절을 읽고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영적인 충격을 받습니다. 그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8,21~22의 말씀입니다.

성경 (출처: pixabay.com)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네흘류도프는 이 구절을 읽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끔찍한 죄악으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 유일한 방법이란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임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타인을 벌하거나 교정하는 것은 제 소임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었다. 2권 393p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럴듯한 신앙, 그럴듯한 사랑, 그럴듯한 용서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저 당연하게 여기며 넘어갔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자비와 같은 의미가 이 작품을 통해 극대화되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래, 좋은 말씀이지.’, ‘그래, 이렇게 살긴 살아야지.’하며 겉핥기 식으로 지나쳤던 예수님의 말씀들이 『부활』을 통해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들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당대의 정치와 기득권,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성경적 의미로 가득 찬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톨스토이를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게 하지요. 하지만 외적인 허위를 모두 걷어내고 오직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톨스토이의 시각은 결코 우리의 신앙을 흔들리게 하지 않습니다. 더욱 견고하게 할 뿐입니다.

  이 책은 자신이 지닌 알량한 자존심, 허영심, 권위, 안락함, 욕심을 버리면서까지 누군가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더욱 저를 부끄럽게 하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걸 망설이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부끄러워 떨리는 손과 마음을 다잡으며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 결국 한줄기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위안을 얻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나머지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그런데 우리는 ‘나머지’ 것들만 찾고 있으니 끝내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 내 삶의 과업은 바로 이것이다. 이제 막 하나가 끝났고 따른 것이 시작되고 있다.’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날 밤을 기점으로 네흘류도프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의 생활이 새로운 환경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라 그 후로 일어난 모든 일이 그에게는 예전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의 새로운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는 더 지켜봐야 알 것이다. 2권 398p(끝)

작가의 이전글 [서평]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