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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Dec 04. 2020

[서평]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리히 프롬, 『소유나 존재냐』

  사도행전의 저자는 예수님을 믿던 첫 신자들의 공동체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2~47)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소박하면서도 부족함 없이, 서로 간에 기쁨을 나누며 생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산업화되고 분업화된 세계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 모습 같기만 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제겐 위와 같은 첫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의 생활이 더욱 이상적으로 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까요? 수없이 많은 물질적인 풍요가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소박하면서도 자신의 대부분의 것을 나누며 사는 삶은 몇몇 독특한 사람만이 살 수 있는 모습으로만 보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를 축적한 개인이 동경받습니다. 화려하고 매력 넘쳐 보이는 상품들은 TV와 다양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고급 아파트, 고급 승용차 광고는 그러한 것들을 소유한 사람만이 가치 있고 품격 있는 사람이라고 속삭이기도 하고요. 다양한 광고와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는 어떠한 상품에 대한 소유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깁니다.

  우리가 현대에 이르러 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만, 이러한 물질적 풍요가 우리의 무조건적인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고 있을까요? 오늘날 물질적 풍요 안에서도 여전히 절망과 피로, 슬픔에 내던져져 있는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물질적 소유가 인간 존재의 삶의 의미에 척도가 될 수 없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pixabay.com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물질적 소유가 인간 존재 가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생각처럼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더 많은 소유를 동경하고 물질적 소유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며 나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선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 ‘이 세상을 다 살고 인간은 어디로 떠나는 것일까?’와 같은 질문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고 맙니다. 나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묻기엔 부동산 값, 주식의 등락, 최신형 자동차나 전자제품, 명품 옷과 액세서리가 내 삶의 너무나 중요한 목표이자 이유가 되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요.

  소유와 소비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소비문화 안에서 과연 자기 자신의 진정한 존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이번에 함께 나눌 책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소유나 존재냐』와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널리 알려진 저술가이자 학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책들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1900년 3월 2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한 유다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년시절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유다교의 건강한 자양분을 밑거름 삼아 성장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는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을 공부하여 1922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심리분석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1934년 이후론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한 많은 대학의 강단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소유나 존재냐』는 80세까지의 삶을 살았던 그가 76세 때 저술한 책으로, 평생 쌓여온 그의 지성과 사상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책이라고도 평가됩니다. 『소유나 존재냐』는 현대사회의 위기를 진단하며 그 위기의 원인을 사회경제구조와 개인의 실존양식이 지나치게 ‘소유적’이라는 데에서 찾습니다. 프롬은 심리학적, 사회학적, 철학적, 종교적 성찰을 통합하며, 현대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사회경제구조와 개인의 실존양식이 소유지향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여 ‘존재 지향적’인 태도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프롬은 인간 내면에는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두 시를 통해 좀 더 쉽게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시는 19세기 영국의 시인 테니슨의 시이고, 두 번째는 17세기 일본의 시인 바쇼의 시입니다.


  테니슨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출처: pixabay.com

  지금 뿌리째로 손 안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그리고 바쇼의 하이쿠는 다음과 같다.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두 편의 시의 현격한 차이는 얼른 눈에 띈다. 꽃을 본 테니슨의 반응을 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그는 꽃을 “뿌리째로” 뽑아 든다.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꽃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 그러나 꽃에 대한 바쇼의 반응은 판이하다. 그는 꽃을 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건드려보려고조차 않는다. 그는 “알아보기” 위해서 다만 “눈여겨 살펴볼” 뿐이다. 35~36p


  소유적 실존양식이란 테니슨의 시에서 보이는 관점대로 대상을 나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존재적 실존양식이란 바쇼의 시에서 보이는 관점대로 대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도 그것과 관계 맺으려 하는 태도입니다. 프롬은 서구 산업사회가 불러온 인간 실존의 특징을 돈, 명예, 권력에의 탐욕이 삶의 지배적인 주체가 되어버린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찾습니다. 그가 지적하는 소유적 실존양식의 가장 큰 문제는 사물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소유적 실존양식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자아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각기 소유물로 느낀다는 점, 그리고 그 ‘사물’이 우리 자신을 확인하는 경험적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108p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내면의 가치, 선함이나 사랑, 배려, 이타심이 아니라 내가 가진 부동산과 자동차를 비롯한 탐욕과 욕망을 채워주는 사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한 인물을 바라볼 때도 그의 인성, 인품, 성격, 말투, 태도, 선한 의식보다는 가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집중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나=내가 가진 것=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적용된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른 문제점은 내가 가진 사물을 다 잃었을 경우,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 나의 자아는 없어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구는 독점의 욕망과 함께 존재하기에 이기적으로 되어야 하고 남을 종속시켜야 합니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내 존재가 보증되기에 탐욕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타인은 경쟁자가 되고 나와 적대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존재적 실존양식은 소유적 실존양식과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프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우리가 소유적 실존양식을 제거하는 데에 비례해서(다시 말하면, 우리가 소유에 매달림으로써 그것에 안주하고 자아와 가진 것에 집착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하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감소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관철될 수 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 중심주의와 아집을 버려야 하며, 신비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가난하게’하고 ‘텅 비워야’한다. 130~131p


  마태오 복음에 나온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존재적 실존양식은 소유에 의해 안정감을 얻거나 위로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면 안의 자신의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창조의 힘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적 소유에 집착하는 태도라든지 타인과 투쟁하고 갈등하여 승리를 쟁취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 사랑과 슬픔,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태도입니다.


  『소유냐 존재냐』는 학습, 기억, 대화, 독서, 권위 행사, 지식, 신앙 그리고 사랑과 같은 다양한 일상에서 소유 혹은 존재의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다른 대상을 소유하고 독점하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한 소유양식은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외부로부터 찾게 합니다. 무제한적인 인간의 탐욕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소유양식은 끊임없이 사회의 갈등과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 양식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실존적 요건이라는 것입니다.

  프롬은 존재적 실존양식의 해답을 그리스도교와 불교, 그리고 많은 사상가에게서 찾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 예수와 부처, 아리스토텔레스, 독일의 그리스도교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프로이트, 마르크스, 슈바이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상가의 사상에서 존재양식의 의미를 찾아냅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존재적 실존양식의 삶에 대한 합리적인 종합적 사고를 이끌어 냅니다. 사물과 탐욕에 예속되지 않은 채 인간 고유의 내면을 완성하는 존재적 실존양식의 가치의 의미를 심리학적, 철학적, 종교적 의미에서 규명해 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탐욕과 시기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그 뿌리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프롬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탐욕과 시기심이 강하게 노출되는 현상은 천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늑대들 틈에서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보편화된 압력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사회적 풍조가 바뀌면, 즉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가치관이 바뀌면, 이기심으로부터 이타심으로의 이행(移行)도 한결 용이해지리라고 믿는다. …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존재양식)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기존의 인간과 동떨어진 인간이 아니다. 문제는 다만 방향 전환인 것이다. 283~284p

출처: pixabay.com

  개인 실존양식의 변화가 사회의 구조적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고, 또 그것이 개인의 실존양식의 변화를 가져올 일종의 순환구조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저자의 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변화가 아닌, 내면에서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지요.


  저 역시 저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소유적 실존양식은 단지 사물을 대상으로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독점하려는 인간에 대한 소유욕일 수도 있고, 지식이나 지혜 역시 내가 가진 것만이 옳다는 배타적 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신앙에서도 소유적 실존양식의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의 권위, 종교적 권위를 독점한다는 것은 신앙 공동체 외부의 것들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성향을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한 사도행전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독점하고 있다는 배타적인 소유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서로에게 내어주고, 있는 것을 나누면서 자기 내면 안에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그들을 존재적 실존양식으로 살아가게 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끊임없이 광고와 소비의 홍수 속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질적인 풍요에 자기 자신을 예속시키면서 삶을 채워나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물질적인 것들이 모두 내 손을 떠났을 때, 내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을 때, 그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소유로 규정되지 않는 내면의 존재에 확신을 가질 때 자기 삶에 대한 확신도 갖고, 소비문화라는 조류에 휩쓸리지 않는 힘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내 삶의 빛나는 부분이 어디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존재양식으로의 삶을 따르며, 자신의 내면의 존재에 가장 빛나는 곳이 어디인지, 또 나의 존재 가치가 어떻게 빛나는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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