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허나드, 『높은 데서 사슴처럼』
제 안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볼 때면, 어떠한 구체적인 변화가 없더라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어떨 때는 기쁨과 희망에 부풀어 올라 일상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무기력한 마음이나 회의감이 일어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으로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습니다. 변화가 없는 똑같은 일상일지라도 그날의 내면의 울림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다르게 다가온다는 걸 느끼기도 하고요. 내면의 힘이나 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화엄경』의 핵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신앙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우리의 마음에 따라 때때로 변하는 걸 느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엔 하느님에 대한 찬미와 감사, 하느님을 알게 해 주신 기쁨에 젖어 벅찬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 반면, 또 어느 순간엔 신앙에 대한 회의감, 의심, 신앙이 과연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이냐며 무력감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부침(浮沈)을 겪기 마련입니다. 작은 것에도 기쁨과 희망을 찾는 섬세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고, 절망과 체념의 늪에 붙잡혀 아무것도 못한 채 불안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절망과 체념이 신앙적으로 나쁘다고만 봐야 할까요? 저는 앞뒤 가리지 않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신앙을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어렵고 어두운 곳에서 오히려 신앙의 빛이 더 강렬하고도 선명하게 비출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신앙의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결코 사람에게 강압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밀어넣는 모습이지 않을테니까요.
이번에 함께 나눌 책은 나의 삶이 어둡고, 여러 가지 것들을 체념한 채 절망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앙이 우리에게 어떻게 밝은 희망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로 들려줄 H. 허나드의 『높은 데서 사슴처럼』입니다.
『높은 데서 사슴처럼』의 저자 H. 허나드(Hannah Hurnard, 1905~1990)는 영국 출신의 그리스도교 작가입니다. 그녀는 1905년 영국 잉글랜드의 남동부 콜체스터 출신으로 신앙심이 깊은 퀘이커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말을 더듬기도 했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할뿐더러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는 등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회심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힘을 얻고 하느님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선교사로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지내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아마 고통과 시련에 시달렸던 경험이 있던 그녀였기에, 아픔을 딛고 신앙을 찾아 나서는 내용의 우화소설 『높은 데서 사슴처럼』을 저술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높은 데서 사슴처럼』의 주인공은 두려움입니다. 소설의 인물들은 우리의 감정들이 의인화되어 등장합니다. 주인공 두려움은 수치의 골짜기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서움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두려움은 한쪽 다리가 짧아 절뚝거리고, 입이 비뚤어져 보기 흉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자신감도 없었고, 자신의 모습을 창피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은 양 떼를 이끄는 목자였습니다. 목자 밑에서 일하는 것만이 두려움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목자는 그런 두려움에게 자신과 함께 높은 데에 있는 사랑의 왕국으로 떠나자고 제안합니다. 수치의 골짜기와는 달리 기쁨과 행복이 있는 사랑의 왕국으로 가자고 말입니다. "하느님은 내 다리를 암사슴의 다리마냥 날래게 해주시고, 높으나 높은 곳에 나를 세우셨나이다."(시편 17,34: 하바 3,19)라는 말씀이 이뤄질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사랑의 왕국이었습니다.
두려움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혐오와 끔찍함을 느끼면서도, 무서움 가문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목자의 의해 용기를 얻고, 친척들의 방해를 겨우 따돌리며 사랑의 왕국으로 길을 떠납니다.
두려움은 자신의 여정 안에서 목자가 자신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붙어있길 원했지만 목자는 그렇게 되면 완전한 여정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동반자인 슬픔과 고통을 붙여줍니다. 이들이 끝까지 동반해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목자는 두려움이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나 방해물을 만났을 때는 자신을 부르라고 했습니다.
목자가 없는 틈에는 비겁함, 씁쓸함, 원망, 자존심, 자기 한탄 같은 인물들이 두려움을 집요하게 따라오며 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협박하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다시 자기들과 같이 수치의 골짜기로 내려가자고, 목자는 사기꾼이며,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두려움은 목자를 믿고 길을 나서지만 어렵고 힘든 길을 만날 때마다, 무서움 가문의 방해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약해집니다. 다시 목자의 도움을 받아 힘을 얻고 사랑의 왕국에서 행복할 것을 희망하지만 유혹 앞에서 마음은 또다시 무너지고 맙니다. 두려움은 도무지 자기가 넘을 수 없어 보이는 난관이나, 다시 내려가자는 집요한 유혹을 받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과연 저를 그곳에 데려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계속해서 목자님께서 저를 포기하시지 않고 제게 마음을 써 주실지 모르겠군요. 저는 죽어도 이 절름발이 다리밖에는 못 가질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다리가 사슴의 날랜 다리가 되게 하실 수도 없으실 것 같고요.”
가엾은 두려움은 바보스럽게 말했다. 128p
두려움이 목자에게 이 말을 했을 때는 이미 사막과 절벽과 같은 온갖 어려운 난관을 몇 번이나 이겨냈을 때였고, 실의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다시 목자에게 위로받고, 희망을 마음에 되새겼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은 또다시 반복적으로 불만과 절망의 늪에 빠집니다. 지난한 반복입니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의 모습이 결코 바보 같거나 미련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려움의 모습에서 바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무언가 신적인 위로를 받거나 영적인 기쁨을 느낄 때면 그 어떤 때보다 믿음이 깊어집니다. 신앙에 대한 용기도 생기고, 삶의 새로운 활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해집니다. 조금의 어려움을 겪으면 다시 불만과 불만족이 내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 대해 결코 나쁘다거나 부족한 행실이라고 다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소설 속 두려움처럼 언제나 현실의 두려움 앞에서 나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요한 건 절망에 때에 하느님을 부르는 절실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절망 안에서 희망의 한줄기 빛을 다시 마음에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려움이 목자의 도움으로 많은 난관을 헤쳐나가며 목자와 사랑의 왕국에 대한 희망을 마음에 굳게 새깁니다. 하지만 사랑의 왕국이 얼마 남지 않을 무렵, 순간 다시 절망과 체념에 빠진 두려움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깜깜하고 무서운 한순간, 두려움은 목자를 따르는 것을 그만두고 돌아갈 생각을 했다. 이 길로 계속 갈 필요가 없다. 의무적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목자가 그 길을 선택해 주었기 때문에 그 낯선 길을 안내자인 두 친구를 따라왔을 뿐이다. 그 길은 원래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다. 이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러면 슬픔과 고통이 즉시 멎게 되고, 목자 없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일생을 계획할 수 있다. 155p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려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 말씀을 반대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무거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거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아주 편하고 달콤한 세상 것들에 대해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 자비, 용서와 같은 단어가 쉽게 들리지만 막상 계명으로 실천한다고 하면 그 무게가 전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내 가슴을 마구 찔러대는 아픔까지도 용서해야 하는 게 신앙인의 숙명입니다. 이 숙명의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이 계명들을 실천한다고 해서 눈앞에 현실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약한 현실은 끊임없이 내게로 밀려옵니다. 그래서 회의감이 들고,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습니다. 이 무거운 십자가에서 벗어날 방법은 쉽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설 속 두려움도 이런 상황이었나 봅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고, 목자에게 힘을 얻고 이겨내기도 했지만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절뚝거리는 다리, 비뚤어진 입은 그대로입니다. 물론 조금씩 희망을 가지면서 긍정적인 생각은 많이 하게 되었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두려움은 이 길은 자기가 가고 싶었던 길이 아니라고 지금까지의 여정을 부정하고 싶어 합니다. 두려움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옵니다.
목자는 끊임없이 두려움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지난하고 반복되는 불안과 체념에도 높은 데를향한 희망을 속삭여줍니다. 사랑의 왕국에 거의 다다랐을 때 두려움은 크고 웅장한 폭포를 봅니다. 그녀는 엄청난 크기의 물줄기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무서움을 느낍니다. 폭포가 머뭇거리지도 않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산산조각 나버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에게 목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신을 내주는 것이 바로 물의 삶이란다. 물에게는 단 한 가지 바람이 있지. 아래로 내려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기를 몽땅 내어주는 것이야. 너도 물이 그 훌륭한 충동에 복종했을 때, 무시무시하게만 보이던 장애물들이 물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기쁨과 영광을 더해 주는 것을 보게 되면 내 말을 이해할 거다.” 168p
두려움은 점차 사랑의 마음을 키워가고 자신을 내어주는 의미에 대해서도 깨달아갑니다. 길을 떠나기 전 목자는 두려움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높은 데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데로 떠나는 여행의 출발점이란다. 네가 사슴의 날랜 다리를 갖게 되고 ‘산과 산들을 뛰어넘어 다닐 수’ 있을 때 너도 나처럼 기쁘게 자기를 내주며, 높은 데서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있고 또다시 산으로 올라갈 수도 있게 될 거다. … 그건 사랑의 높은 데서만 누구든지 자기를 온전히 내주며 자신을 아래로 던질 수 있는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
이 말은 퍽 신비스럽고 이상하게 들렸다. 52p
두려움은 처음 했던 목자의 이 말을 점차 깨달아 갑니다. 남에게 군림하기 위해 높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기 위해 높은 것으로 간다는 역설을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사랑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와 사랑의 진수를 보여준 그리스도 강생의 의미가 새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두려움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높은 데에 있는 사랑의 왕국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날랜 다리를 얻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사랑의 왕국의 주인인 목자와 함께 나누는 행복과 즐거움을 만끽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두려움은 목자로부터 은총과 영광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사랑의 왕국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식의 동화로 끝나지 않습니다. 은총과 영광은 자기가 살던 수치의 골짜기로 다시 내려가고자 합니다.
“은총과 영광은 분명히 이해했다. 그녀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진리를 보고 있었다.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그녀처럼 임금님에게 인도되어 사랑의 왕국과 높은 데로 왔고, 그리하여 그들도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자기를 포기하며 모든 것을 바쳐 그네들이 받은 삶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저 아래 슬프고 쓸쓸한 곳으로 임금님과 함께 내려갈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234p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은 은총과 영광은 다시 수치의 골짜기로 내려가 그곳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로 용기를 냅니다. 자기 내어줌이라는 사랑의 가치를 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복음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복음서에는 다양한 극적인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중 시각적으로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마르 9,2~10)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어, 그곳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예수님은 새하얀 모습으로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베드로는 놀라운 모습으로 변한 예수님의 모습에 압도되었을뿐더러, 자신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였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까지 했으니 그에겐 얼마나 놀라운 순간이었을까요. 자신의 모든 걸 다 버리고 그 ‘높은 산’에서 그분들이 머물고 자신도 그 옆에서 머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높은 산’에서 다시 그들을 데리고 내려오십니다. 그들이 체험한 영광은 나중에 그들이 선포할 복음의 자양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감이나 만족감에 머물려는 모습이 아니라, 다시 내려가 세상에서 그 거룩한 체험을 가슴에 안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 속 은총과 영광 역시 목자와 함께 누리던 행복을 만족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두려워했던 수치의 골짜기로 내려가려 합니다. 신앙으로부터 얻은 용기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인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온갖 두려움과 절망에 지쳐있는 삶의 한복판에서 한 줄기의 희망이 얼마나 절실한지요. 심지어 어느 정도 희망을 맛보더라도 언젠가 절망은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그럴 때 다시 희망을 찾고 용기를 얻는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를 『높은 데서 사슴처럼』이란 작품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높은 곳’은 어디인지,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해가고 있고, 왜 그 길을 향하고 있는지, 이 소설을 읽으며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결국 우리의 종착점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 되길 오늘도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