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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말구 Dec 30. 2020

[서평] 거룩함을 열망하며

토마스 아 켐피스, 『준주성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처음 『준주성범』을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을 뿐, 아직 많은 것들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처음으로 해보는 공동생활도, 하루에도 반복적으로 하는 기도시간도, 처음 접한 철학수업도 무척 낯설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나, 사제의 삶에 관해서도 아직 명료함도 갖춰지지 않았을 때였고요.

혜화동 신학교 전경

  『준주성범』은 신학생들의 필독서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안에서 『준주성범』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당시 처음 접한 『준주성범』은 제게 아주 혹독하고 엄격한 신앙지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충실한 신앙으로 사는 삶을 위해서는 아주 작은 것에도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으로 나를 채워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준주성범』에 나오는 내용처럼, 신앙이란 아주 철저한 투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투신한다는 것. 이것은 제가 동경하는 모습이기도 했지만 차갑고 예리한 느낌으로도 다가왔습니다.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 회의(懷疑)를 품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린 칼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정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벅찬 십자가 같기도 했고요.

  한참이 지나 사제가 된 후, 다시 『준주성범』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20살 때 읽은 느낌과는 전혀 다르더군요. 『준주성범』이란 책은 신앙인의 따뜻한 안내자이자, 신앙의 길을 함께 걷는 위로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함께 말입니다.

  『준주성범』이란 책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도 하지요. 그리스도교의 참된 고전(古典)입니다. ‘고전’이라는 이름이 붙기 위해서는 시간을 관통하는 지혜와 성찰이 담겨 있어야합니다. 『준주성범』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마음속 신앙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번에 함께 다룰 책은 바로 이 책,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준주성범』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독일 출신의 영성가이자 종교 저술가입니다. 독일 쾰른 부근 켐펜에서 출생한 그는 네덜란드에서 학업을 한 뒤, 1399년 아우구스티노회 수도회로 입회합니다. 1413년 33살에 사제서품을 받고, 이후 기도와 노동, 학업에 힘쓰며 수도자로서 살아갑니다. 그는 92살이 되던 해인 1471년 수도원에서 선종했습니다.

  그가 저술한 『준주성범』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신앙 지침서이자, 영적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시련과 고통, 온갖 유혹 안에서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이들의 우물이 되어주었습니다. 또한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과연 지금 나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게 맞나?’, ‘지금 내가 왜 신앙 생활을 하고 하느님을 찾아야 하는 거지?’와 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게 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준주성범』은 신앙의 지혜, 십자가의 지혜를 가득 담은 보고(寶庫)가 되어줍니다.

  『준주성범』의 전반부는 저자가 독자에게 신앙인의 삶과 행실, 그리고 내적인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후반부에서는 ‘주님의 말씀’과 ‘제자의 말’이 오가며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고요. 이를 통해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란 무엇인지를 들려줍니다.  

  저자는 독자에게 끊임없이 순명과 절제, 인내와 애덕, 통회와 겸손을 촉구합니다. 저자가 나열하는 삶의 모습은 결코 듣기 좋거나, 실천하기 쉬운 것들이 아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일게 할 정도의 아주 철저히 그리스도께 맞춰진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완전한 자기 비움을 통해 얻게 될 마음의 평화와 하늘나라의 상급에 대한 희망도 함께 들려줍니다. 저자는 개인의 사욕을 극복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출처: pixabay.com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탐할 때 불안함을 느낀다. 교만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은 한순간도 평안히 지낼 수가 없다. 마음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은 평화롭게 산다. … 마음의 참된 평화는 사욕을 극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지, 결코 그 사욕을 채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육신의 노예가 된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깥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열심히 영적 생활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다. 30~31p


  성당을 처음 나오신 분들, 앞으로 세례를 받길 희망하시는 분들에게 왜 종교를 갖길 원하시냐고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주를 이룹니다. 맞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영적인 갈망은 내면의 평화로움과, 안정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종교를 찾고, 성당에도 옵니다. 하루, 이틀 성당에 나오고,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세례도 준비합니다. 세례를 받고 성당에서 사람을 사귀어가며 성당 다니는 재미도 조금씩 맛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좀처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은 밉고 가슴 한구석은 갑갑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성당이나 교회, 절에 ‘오고 가는 행위’에 의해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결연한 내적 결단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성당에 다닌다는 그 자체가 마음의 평화에 대한 보증수표가 되지 못합니다. 성당에 나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자신의 부끄러움과 감사함을 깨닫는 과정이 정화의 과정일 것입니다. 종교를 갖는다고 마음의 평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거기에 맞춰 뚜벅뚜벅 걸어 나갈 때 비로소 평화의 빛이 생길 것입니다. 그 ‘길’은 저자의 말처럼 사욕을 넘어서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향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조금은 험난할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저자는 세상에서의 가난과 비참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위로에 기대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지는 신앙이 필요하며, 세상의 안락함에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의 고통과 시련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기에 눈을 하늘에 돌려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출처: pixabay.com


  어디를 가면 하늘 아래 있는 것에서 영원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네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렇게 만족할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네가 모든 것을 다 본다 할지라도 그것이 허무한 환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눈을 하늘로 들어 하느님께 향하고 네 죄와 소홀함을 뉘우쳐 기도하라. 헛된 사물은 헛된 사람들에게 버려두고 하느님께서 네게 명하신 것에 마음을 두어라. 65p


  가톨릭에는 성모 찬송(聖母 讚頌, Salve Regina)이라는 아름다운 기도가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마쳤을 때, 성무일도를 마쳤을 때 자주 부르곤 하는 기도이자 노래입니다.   


성모 찬송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 당신 우러러 하와의 그 자손들이 /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나이다. / 슬픔의 골짜기에서. / 우리들의 보호자 성모님, / 불쌍한 저희를 /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 귀양살이 끝날 때에 /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 뵙게 하소서. /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 오! 아름다우신 동정 마리아님.


  성모님께 우리를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 닿게 해 달라는 간절한 전구(轉求)입니다. 이 기도를 잘 살펴보면, 기도하는 장소는 ‘슬픔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삶이기도 하고요. 이 말이 너무 패배주의적이거나 비관적으로만 들리시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동반하고 있는 아픔과 슬픔, 고통과 고뇌를 떠올리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안락함과 여유로움을 찾지만 언젠간 아프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또 힘들고 어려운 세상살이가 나를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슬픔의 골짜기’이자 ‘귀양살이’하는 말이 비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이곳만이 아픔과 슬픔을 기쁨과 희망으로 꿈꾸고, 신앙을 꽃피우는 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주성범』의 저자도 세상일에만 파묻힐 것이 아니라 “눈을 하늘로 들어 하느님께 향하고 네 죄와 소홀함을 뉘우쳐 기도하라.”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겪고 시련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내적으로 단단해질 것을, 어려움에서 희망을 찾을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은 네가 위로 없이도 고통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시고, 너 자신을 오직 당신께 맡기기를 바라시며, 고통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도록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며 사방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 그 모든 곳에서 십자가를 만날 것이다. 그러니 내적 평화를 누릴 마음이 있고 영원한 월계관을 얻을 마음이 있다면, 어느 곳에 가든지 인내할 필요가 있다. 127p


  『준주성범』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만일 이 책을 신앙 없이, 세상의 시각으로 읽는다면 그저 패배와 아둔함의 기록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의 비참과 고난을 묵묵히 참아내고 인내해야 한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하지만 이런 패배와 아둔함의 기록을 신앙의 눈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승리와 지혜의 기록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랬고, 예수님의 지혜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무력하게 모욕받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 사실에 대해 십자가의 승리이자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시어 모욕받고, 비참하게 죽으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신이 먼지나는 세상에 내려와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다는 것. 인간과 똑같은 고통과 죽음을 겪으셨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뜻에 따라 『준주성범』은 세상의 지혜와 세상의 승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저 귀에 듣기 좋고, 마음에 한 번 새길만한 ‘자기 계발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닮기 위한 어려운 여정에 동반하는 십자가입니다.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고독과 슬픔에 힘들어하는 이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속삭임입니다.


  『준주성범』의 원문인 라틴어 제목은 'De Imitatione Christi'입니다. 영어로는 'The Imitation of Christ'이고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 본받는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의를 느끼거나,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몰아볼 것이 아니라, 하루에 한 구절씩 머리와 마음에 새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준주성범』을 통해 세상의 지혜가 아닌 십자가의 지혜를 맛보게 됩니다. 이 지면에서는 『준주성범』의 많은 지혜를 담지 못했습니다. 직접 책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길을 함께 걸어갈 준비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슬픔의 골짜기’라는 인생에서 어디에 우리의 희망과 가치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은 실패가 있겠지만 『준주성범』을 읽으며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겸손과 인내, 절제와 애덕과 같은 거룩한 성품을 내 안에 담고 싶다는 열망을 오늘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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