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던 길키, 『산둥 수용소』
폴란드 출신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Maximiliano Maria Kolbe, 1894~1941) 성인을 기억해 봅니다. 콜베 성인은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을 수도원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되어 유대인들을 피신시켰다는 이유로 1941년 2월 28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잡혀갑니다. 콜베 성인은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사제이자 수도자로서 수감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신앙으로 격려했습니다.
어느 날 콜베 성인이 속한 수용소에 수감자 한 명이 수용소를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선 한 명의 탈출자가 발생하면 열 명이 처형을 받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처형받게 될 열 명의 수감자가 정해졌는데, 그중 한 명이 자신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며 울부짖었습니다. 이에 콜베 성인은 그 사람 대신 자신이 처형을 받겠다며 자원합니다. 결국 콜베 성인을 비롯한 열 명의 수감자들은 아사형(餓死刑)에 처해졌고, 나치는 2주 이상 살아남은 콜베 성인에게 독극물을 주사했습니다. 그날인 1941년 8월 14일, 콜베 성인은 세상을 떠납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른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971년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되었고, 이후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매년 8월 14일이면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축일을 지내며 성인의 희생을 기억합니다. 저 역시 이날 미사를 봉헌할 때면 목숨을 내어놓은 성인의 일화를 떠올립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무딘 마음으로 이 날을 지나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성인이셨기에 가능한 희생이었다는 다소 안이한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콜베 성인이 처했던 상황에 저 자신을 대입하여 가만히 생각해보면 성인의 희생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생에 대한 인간적 본능을 이겨낸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혹독한 노동과 형벌, 눈앞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희생과 자비, 넓은 마음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콜베 성인의 희생의 이야기를 그저 한 성인의 미담(美談)으로 듣고, 감명받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그의 복음적 희생이 숨을 턱 막히게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모든 것이 통제되고 억압된 곳에서 나라면 어떻게 행동하고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을까 하는 한층 심도 깊은 질문으로 저를 안내해준 한 권의 책을 읽고서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의 삶이 더욱 숭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책은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랭던 길키(Langdon Brown Gilkey, 1919~2004)의 저서 『산둥 수용소』입니다.
랭던 길키는 20세기의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로서 1954년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의 지도 아래 1954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는 1939년 하버드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는데, 졸업 후 중국으로 떠나 베이징의 연경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 했습니다. 그때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같은 동맹국을 제외한 중국에 있는 외국인들을 포로수용소에 수감시킵니다. 이에 랭던 길키 역시 1943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산둥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저자는 수용소 생활을 하며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수용소에 관한 단순한 수기(手記)라기 보단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아냅니다. 그의 저서 『산둥 수용소』는 억압되고 통제된 상황 안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인간으로서 가치와 희망을 어떻게 찾았는지에 관한 실존 보고서인 것입니다.
당시 중국에서 생활하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미국, 영국과 같은 국적의 서양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업가로서, 교사로서, 선교사로서 중국으로 떠나왔습니다. 대부분 가난했던 중국 민중들의 삶보다는 훨씬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도 했고요. 그랬던 그들에게 수용소 생활은 더욱 참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자는 먼저 수용소에 도착해 있는 이들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며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쓰레기장이나 뒤지는 부랑자들 같구먼, 왜 좀 씻지도 않는 거지?’ 그들을 보자 극도의 암울함이 나를 덮쳤다. 우리도 시간이 지나면 저들처럼 음울하고 너저분해질까? 우리도 저들처럼 활기 없고 불결한 모습으로 살게 될까?” 22p
저자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추위와 더위에 모두 노출된 수용소, 지저분한 주방, 턱 없이 부족한 식량, 흙먼지 날리는 바닥과 스스로 치워야 하는 변소. 비록 중국에 있었지만 나름대로 안락한 삶을 영위해온 그들에게 수용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생활환경뿐만 아니라 고된 노동에 참여해야 하고, 부족하거나 망가진 것들도 수감자들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던 사회적 관계는 뒤바뀌고 맙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인간의 기본적인 덕성이 갑자기 제자리를 찾고 평가되기 시작했다. 일하고자 하는 의지, 일하는 기술, 천성적인 쾌활함이 훌륭한 인품으로 인정되었다. 주방이든 제빵소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잘 웃고 동료에게 관대한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 돈 많고 교양이 풍부한 농땡이나 불평꾼과는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 마침내 우리는 이웃 사람을 보면서, 그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인간인지와 관련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51p
우리가 인간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물질적인 것들을 주목하곤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를 신경 쓰며,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고요.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얼마나의 재산을 가졌는지가 한 인간을 규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저자가 처한 상황처럼 모든 것이 박탈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실제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내 존재를 맡겨버릴 때, 인간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웃음, 선량함, 도덕성, 성실함보다는 지위와 명예, 재산과 권력을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저자의 경험을 되새겨보며, 이따금씩 내가 아무것도 갖지 않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은 어떨지 성찰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공허한 체 외부의 꾸밈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는 훈련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인간다운 인간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수용소에 들어온 이들 중에는 사업가와 교사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개신교의 선교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용변 치우기와 같이 하기 싫은 일들을 먼저 나서서 했고, 유쾌하고 활기찬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재밌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수감자 중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자도 있었는데, 그는 철조망 바깥에 중국인들에게 몰래 돈을 주고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밀수를 하며 그것을 수감자들에게 나누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일본군에 의해 밀수가 적발되어 독방 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손뼉을 치며 기뻐하며 독방으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알 턱이 없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의아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자는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유쾌하고 성실한 모습이 공동체의 큰 유익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교황청의 도움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앞서 수용소를 떠나게 되었는데, 저자는 그것을 못내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자에겐 점차 신앙의 위기가 다가옵니다.
“노동 팀의 어느 누구도 철학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일이 수용소 작업으로 합당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게는 이 사실만으로도 이런 활동의 사회적 무용성이 충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지적이고 ‘종교적인’ 직업들은 분명히 실제적 삶과는 무관하다.” 138p
분명한 신앙을 가졌던 저자에게도 생산적인 일이 곧 선한 것으로 치환되는 수용소 안에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 내면의 영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흐려져만 갔습니다. 오늘날 현대산업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겪는 종교에 대한 무용론과 맥을 같이 합니다. 실제 삶과는 동떨어진 채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종교와 영적 의미가 과연 인간에게 유익을 가져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지요.
이러한 의문을 가진 채 시간이 흐르자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술적인 지식과 방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다시 말해 ‘도덕적’이거나 ‘영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위기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로 인해 야기되었다.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진실성과 자기희생이 더 요구되었다.” 142p
저자는 ‘기술의 실패’가 아니라 ‘인격의 실패’가 수용소 내부의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고 판단합니다. 수용소 내부의 사람들은 점차 자기 이익을 좇기 시작했습니다. 공정하게 분배해야 할 식량을 몰래 빼돌리기도 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다른 사람이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받고 있는데도 말이죠. 저자는 사람들의 행위의 기준이 점차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책에서는 이와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합니다. 도덕적 해이로 인한 이기심이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유롭고 풍족한 사회에선 사람의 마음도 여유로웠습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통제된 암울한 곳에선 사람들이 점차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이기심을 ‘원죄’의 의미와 관련하여 파악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 이기심을 포장하기 위해 애써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아내려 하는 모습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경계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에 그럴듯한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붙입니다. 문제는 스스로도 그렇다고 속이기 때문에 깨닫기가 힘듭니다. 저는 여기서 ‘자기 객관화’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나를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능력과 용기에 대해서 말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럴듯한 이유를 들먹이며 결국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런 내면을 조금이라도 읽어내기만 해도 발끈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마침내는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고 맙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바라본다는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끄러움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고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 ‘과연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은 무엇일까.’와 같은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부끄러울 줄 아는 가난한 마음과 함께.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개인의 뛰어난 능력보다도 개인의 도덕성, 청렴함이 있는 사람에게 중요한 직책(보급품이나 식품과 관련한)을 맡겨야 한다는 걸 깨닫습니다.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청렴하냐가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높은 기준이 된 것입니다.
“공동체의 도덕성은 분위기와 풍조 같은 모호하고 비합리적 문제이지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 한 영역에서 기초적인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나면 다른 영역에서도 이런 기준은 세워지기 힘들다. … 도둑질 같은 도덕적인 질병은 페스트가 인체에 미치는 것만큼이나 파괴적인 영향력을 공동체에 끼쳤다.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이런 파괴적인 영향이 가시적으로도 드러났다. … 그해에 절도의 양이 급속도로 늘어나자 공동체는 자멸해가는 양상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했다.” 279~280p
마지막으로 저자는 거룩함과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제시합니다. 수용소엔 개신교 선교사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려 했고, 경건함을 유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공동체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를 ‘창조적이지 못한 생활’이라고 명명합니다.
“개신교 선교사들도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애를 쓰긴 했다. 하지만 전형적으로 이들은 ‘남은 자’ 사상을 갖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쳤다. … 이들은 속으로 세상을 혐오했으며,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자신이 물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반대로 가톨릭 신부들은 세상과 ‘섞였다.’ 그들은 수용소의 누구와도 친구가 되고 그를 도왔으며, 함께 카드를 치고 담배를 피우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공동체 전체에 은혜의 통로였다. 그들을 보면서,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24p
저자는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제가 위의 문장을 꼽은 이유도 단지 개신교와 가톨릭을 비교하자고 함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세상 사람들과는 동떨어져, 자신들의 거룩함에 심취한 채 살아가는 게 결코 건강한 신앙이 아님을 기억하고자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통받고, 어떻게 죄를 씻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섞인’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거룩함과 사랑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시인이자, 현재는 이주노동자와 소년범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 조호진 시인의 다음과 같은 시가 떠오릅니다.
죄 중에 / 가장 큰 죄는 / 주일을 지키지 않은 죄가 아니고 / 십일조를 내지 않은 죄도 아니고 / 피눈물 흘리는 이웃을 보고도 / 눈 깜짝하지 않고 밥 잘 먹는 / 무정(無情)한 죄가 가장 큰 죄라고 / 눈 맑은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 그 말씀에 무조건 아멘 했다.
『아멘』 전문
『산둥 수용소』의 저자 랭던 길키는 위에 인용한 시인의 마음처럼, 진정한 영성이란 이기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눈 깜짝하지 않는’ 마음에선 참된 영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스승 라인홀드 리버의 말을 인용하며 종교와 도덕적 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듯, 종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느님의 은혜가 충돌하는 궁극적인 전투지다.” 360p
인간의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려 애쓰는 마음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기억해 봅니다.
이번에 다룬 『산둥 수용소』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영위하기 위해서 어떤 삶의 태도가 필요할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저자 스스로도 밝히고 있는 바이기도 하지만 산둥 수용소는 다른 수용소에 비해 어느 정도의 자치(自治)가 가능했고, 고문이나 형벌 같은 극심한 고통이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여러 가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인간의 어떤 가치가 빛을 발하는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선량함과 넉넉함을 추구하는 성찰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 가치가 빛나는 인간으로 향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신을 여러 겹으로 쌓고, 가리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어느 정도 본성을 가리기도 하고, 부끄러운 점들을 숨기기도 하면서요. 하지만 『산둥 수용소』라는 책을 통해 다 벗겨진 상태의 인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집니다. 자신을 희생할 줄 알고,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을 아는 모습이야 말로 가장 선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희생과 사랑의 무대가 되길 희망합니다.
극한의 고통과 공포 안에서 마저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닮길 오늘도 하느님께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