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요한 1서 4장 20절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 사랑이 결여된 신앙은 완전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성당이나 제대로 된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유리(遊離)되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웃의 처지, 어려움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성당에 나가 열심히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기도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은총에 힘입어 오늘도 저는 큰 위안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렇게 기도를 드리고 집에 들어와 TV를 켜니 뉴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 저런 위험한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안 되지. 정부는 왜 저런 사람들을 제대로 막거나 통제도 못하는 거야.’ 이어서 뉴스엔 택배 기사가 무거운 택배를 든 채 계단을 오르던 중 기사가 과로사했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번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된 일이네. 하지만 내가(혹은 남편, 아내, 자녀가) 저런 일을 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참. 택배 주문할 것이 있었는데 얼른 주문해야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성경에 말씀이 귓가에 맴돕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2020년 10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을 발표합니다. 제목은 『모든 형제들』에게입니다. 교황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바이러스, 지독한 사회적 양극화, 여전히 온갖 전쟁과 테러를 마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전 인류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회칙(回勅, encyclical)이란 교황이 전 세계 신자들에게 보내는 사목 교서이자 편지입니다. 교황이 발표하는 여러 문헌 가운데서도 무게를 가진 문헌에 속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후 회칙으로 2013년 『신앙의 빛』을 2015년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한데 이어 2020년에 『모든 형제들』이라는 세 번째 회칙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황은 『모든 형제들』이라는 회칙을 통해 전 인류의 형제애를 주제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교황은 먼저 루카복음 10,29~37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율법 교사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유다교 사제도, 레위인도 그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만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루카 10,34) 주었습니다. 게다가 여관 주인에게 돈을 맡기며 저 사람을 돌보아줄 것을 부탁하고 돈이 모자라면 나중에 더 주겠다고 약속까지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질문을 한 율법 교사에게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봅시다. 이 비유는 저마다 조국과 전 세계의 시민이자 새로운 사회의 유대를 건설하는 사람으로서 소명을 되살리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 착한 사마리아인은 몸짓으로 다음 사실을 증명합니다. 우리 각자의 존재는 다른 이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은 지나가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입니다.” 『모든 형제들』, 66항.
예수님 시대의 사마리아인은 유다인으로부터 멸시받던 민족입니다. 정통 유다인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피가 섞여 깨끗하지 않은 민족 취급을 받았습니다. 의로운 유다인을 자처하던 사제, 레위인은 쓰러진 사람을 못 본채 지나갔으나 사마리아인만이 쓰러진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교황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다른 이들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만남’을 강조합니다.
저는 ‘만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주 떠올립니다. 물론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처럼 편안한 만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선 작더라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에 이야기를 들을 준비과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반대로 내가 어렵거나 힘든 처지에 놓였을 때,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가만히 있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내면을 마주하고 서로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기 위해서는 일단 만나야 하며, 그 만남을 진실한 만남으로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쓰러진 사람을 지나친 사제와 레위인,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인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 곱씹어 생각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다운 지혜는 현실과의 만남을 전제합니다.” 『모든 형제들』, 47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엔 많은 정보나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것에 의해 우리가 끌리는 것과 불쾌한 것을 곧바로 분리하는 습관을 경계할 것을 언급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현실과의 만남 없이 이뤄지는 신앙의 유혹은 계속됩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하느님 앞에 머무는 순간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하는 유혹도 있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판데믹 시대, 여전히 사회적 불의와 양극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에 ‘형제자매’의 결속과 만남을 강조합니다.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의 의미와 역할을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지 않으면 살아가고 발전하며 충만에 이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 유대, 친교, 형제애가 있는 곳에 삶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반면에 자족하며 섬처럼 살아가려는 곳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들 안에서는 죽음이 지배합니다.” 『모든 형제들』, 87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형제애를 단지 이상적인 가치나 정신적으로 만족하는 수준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실제 현실에서 비뚤어진 사회적, 경제적 체제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건강하게 성장하거나 타고난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 그들은 능동적인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유만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애인,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들,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자신의 병을 치료할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사회가 시장의 자유와 효율성을 우선 기준으로 삼아 운영된다면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으며 형제애는 그저 또 다른 막연한 이상으로만 남을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 109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유주의, 무제한적인 시장경제 체제가 전 인류 형제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합니다. 형제애라는 윤리적이고 도덕적 가치, 나아가 그리스도교 교리의 완성을 위해서는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인간에 대한 존엄을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그 이유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절대적이거나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모든 형태의 사유 재산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였습니다. 모든 이를 위하여 창출된 재화의 공동 사용 원칙은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칙입니다. 이는 다른 것에 우선하는 자연권이자 타고난 권리입니다.” 『모든 형제들』, 120항.
이밖에도 교황은 회칙에서 여러 가지 현실의 불의와 모순을 언급하며 전 인류가 형제애에 관심 갖길 호소합니다. 아파하는 이웃에 눈을 돌린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닮도록 호소합니다. 이웃 사랑이 결여된 신앙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우리에게 호소합니다.
나아가 교황은 전쟁과 테러, 정치적 억압에서 비롯된 희생자와 그러한 사건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 기억은 분노와 복수의 기억이 아니라 화해로 나아가는 기억입니다. 교황은 지나간 어두운 역사를 잊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발, 그러면 안 됩니다!”라며 강한 어조를 사용합니다.
“오늘날,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앞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넘기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제발, 그러면 안 됩니다! 기억이 없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온전하고 명료한 기억이 없으면 성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집단 양심의 불꽃이 꺼지지 않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형제들』, 249항.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잡아주던 교황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사회의 한쪽에서는 그만 잊자고, 지겹다고 말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 멀리 로마에서 2020년, 그리고 앞으로도 과거의 아픔과 슬픔, 시련과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인류의 양심이자 형제애를 위한 화해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지요.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듯, 아픔과 잘못을 인정할 때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류 형제애의 회복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다른 종교들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활동을 소중히 여기고,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 다른 사람들은 다른 샘에서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간 존엄과 형제애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습니다.” 『모든 형제들』, 277항.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 개방성이 건강한 신앙생활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종교집단이 갖는 폐해는 굳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도 그 문제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진리란 결코 독선적이거나 위협적이지 않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픈 이들, 버려진 이들, 힘없고 나약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인의 분명한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사회 구성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취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만남을 우리에게 재촉합니다. 특히 판데믹 시대이자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늘날, 이웃을 향한 관심을 더욱 강조합니다.
내가 일상 안에서 구체적인 형제애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여전히 힘들지만 거리두기와 방역수칙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 불의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인간적 존엄의 회복을 위한 사회, 정치, 경제 체제가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 정의롭고 재화의 분배가 골고루 미치는 정책에 지지를 보내는 것, 환경오염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들은 결국 지구 상의 가난한 나라들과 약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 일상생활에서부터 환경 파괴를 최소화하는 실천을 할 것 등이 있지 않을까요? 일상에서의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러한 행동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야기한 형제애의 시작이자 희망이 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