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릿속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당신의 역할은 몇 개인가요?

by Jade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은 재직 2~3년 차쯤 되었을 때였다. 하지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잘 느끼지 못했던 흐리멍덩하다는 느낌 때문에 불안감이 점점 커졌지만, 선배들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막내에게 칭찬 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도저히 넘을 수 없었던 한계를 직면한 경험은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당연함에도. 앞에 미확인 장벽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나를 충분히 불안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어로 '가면'이라는 뜻이지만, 이제는 마케팅에서 더 많이 쓰이는 용어인 페르소나(Persona).

연극을 하지 않아도 모두 자연스레 여러 얼굴을 가지고 산다.


부모 자식으로, 형제자매로, 친구로, 배우자로,... 역할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특별히 나쁜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너무 어려웠는데, 내 강박 중에 '차별하면 안 된다',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일관되려는 노력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다던가, 멀리 하고 싶은 사람이 가까이 온다거나.

그래도 "보이는 모습은 하나여야 한다."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 시기쯤 가족여행을 비롯한 모녀여행, 우정여행들이 인스타그램과 맞물려 크게 유행했다. 엄마와 데이트, 가족 단체티, 시밀러룩 같은 해시태그 사이에서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나'는 어쩐지 동떨어진 인간 같아 보였다. 그런데 꼭 그래야만 할까? 저벅저벅 나만의 길을 가는 성격은 의문의 흔적만 남긴 채 곧장 내가 가던 길을 가게 했다. 한 꺼풀 벗기면 훨씬 중요한 질문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사는 거 정말 괜찮아?

↳ 아니요.



공평과 우선순위에 관하여


이제는 안다. 그리고 말할 수 있다. 어릴 때의 세계는 작아서 하나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역할로 확장된 세계는 다르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확장된 세계와 '상호작용' 하는 것도 너무나 다르다. 사람들은 나를 신발 속 빠지지 않는 모래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신발에 굴러 들어가지 않고 관찰을, 연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심지어 '틀어박힐 명분'이 있던 연구자에게도(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PR이 필수적이다. 여러 얼굴을 가지는 것을 이제는 정말로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양한 얼굴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도, 나만큼은 그걸 지속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비중이 다르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때서야 조금은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고 하면서도, 그 시간에 그대로 얹혀있는 나의 인지, 공감, 이해에 들이는 노력은 지나치게 저평가했다.


그런 걸 사회에서는 우선순위라고 했다. 순서만이 아니라 들이는 품 까지도.


계속 정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그런 것에서 왔을 것이다. 나의 사회적 역할이 많아질수록, 그에 충실하려 할수록 스스로 세운 질서와 규칙이 조각 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역할은 무조건적인 헌신을 요구하면서 삶에 위험한 줄타기를 요구한다. 남 보기에 하찮지만 내게 무거운 일도 있다. 거기에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대하려 하다 보면 채워지지 않는 공간 때문에 문제가 남은 느낌을 항상 갖게 된다.


어떤 상황에 '자연스러운' 반응을 할 수 있는 것 역시 능력이 맞다. 거의 모두가 가진 능력이라 특별한 취급을 받진 못하지만, 나는 그러기가 어려웠고, 모든 상황을 열심히 대하느라 오랫동안 필요 이상의 힘을 쓰면서 살았다. 그런 행동은 좋은 평판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역기능과 함께 사람을 탈진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이 글을 본다면 너무 많이 돌아가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지고의 가치인 사랑도 일종의 차별이라고 말하는 '사랑해야 하는 딸들'의 대사는 어떨까.

사랑을 한다는 건 사람을 차별한다는 거잖아.


매거진의 이전글0. 잃어버린 생산성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