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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Dec 28. 2021

읽고 생각해보기

 

체험으로 읽는 티벳 사자의 서 , 강선희 저/불광출판사


전자책 47p/222p


그것은 알아차림(,  , sati)으로 요약할  있다.

다시 말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 혀, 몸으로 냄새와 맛과 촉감의 느낌이 있을지라도 해석하지 않고 다만 나타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면 된다. 그렇게 관조할 때 알아차린 순간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고 할 뿐이다.


그러니 이러한 균형을 잃고 육근을 통해 인식된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면, 그 망상에 끌려가게 된다. 끌린다는 것은 아뢰야식에 잠재해 있는 업력이 현상과 만나는 순간 해석되어지면서 수많은 장면이 펼쳐짐을 말한다. 그것은 즐거운 것일 수도, 괴로운 것일 수도, 짧거나 길게 이어질 수도 있다. 연출자는 업이고, 유일한 관객인 자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펼쳐지는 드라마를 즐기게 되면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연기적 관점에서 육근을 통해 들어오는 대상들과 업력이 만나는 순간, 결합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은 오직 깨어 있는 가운데 알아차리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질 때 육근을 통해 어떠한 대상들과 부딪치게 되더라도 마음이 보호된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성성적적하게 유지될 때 윤회가 멈추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가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

<티벳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다는 것은 채사장의 <열한계단>에서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책 제목만으로도 두려웠는데, 이제 그렇지는 않다.

전자책 밖에 구할 수 없던 해외 생활 시절에 구입해 놓은 책이다. 언젠가는 끝까지 읽어보리라 마음 먹곤하지만 이번에도 끝까지는 못 읽을 것 같다.

몇 페이지 읽다가 궁금한 단어들이 생겼다.


'업'과 '연기가 없는 삶'


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나의 모든 순간은 내 기억속에만 존재한다. 흔적을 남기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 흔적마저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예를들어 사과 한 알을 먹었다면 남는 것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으나 이미 몸 속의 여러 물질들과 상호작용을 해서 변성된 영양분, 먹을때의 기분, 먹고난 후의 느낌, 그때의 분위기, 감정 등등이 아닐까? 그래서 '사과'를 먹는 행위를 떠올린다면, 내게 남은 것은 그에 대한 '기억'밖에 없는 것 같다.


기억은 무엇일까? 이것으로 부터 어떤 순간의 느낌과 감정과 본 것 들은 것들을 조합해서 입체적으로 재현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눈 앞에 펼쳐지지 않는다. 아니면 내 눈 앞에만 펼쳐진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히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으므로.


이쯤에서 세상은 감각기관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섞여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전자는 사람들 간에 공유 될 수 있고, 후자는 공유되기 어려우며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의 밖에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다시 업이란 무엇일까? 내가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것들은 내 기억에 남아 재현되거나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 기억에도 남지 않은 그 행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있기는 했던 것일까? 그 행위들은 어디서 왔었을까? 뇌에서 왔었을까? 누가 지시를 했을까? 어떤 존재가 있고, 뇌를 통해서 행위를 지시받아 시행한 후에는 사라진다. 존재는 왜 지시를 했을까? 흥미롭다.


이런 궁금증들을 풀기위해 인간은 많은 방면으로 실험과 생각을 계속하면서 점점 답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들을 기억하고 싶다. 어떤 존재가 뇌를 통해 내 몸을 움직이고 그 흔적은 뇌를 통해 일부는 기억에 일부는 어디론가 저장된다. 저장이 되었는지, 사라진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애초에 시작했던 그 존재도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감지할 수가 없으므로. 뇌를 통해 기억이 된 것인지 존재의 영역으로 돌아간 것인지,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다시 간 것인지는 모른다.


자, 다시 업으로 돌아와서. 내가 어떤 일을 했다면 그 일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해도 내 존재에 그것은 남아있다고 이해해야 할까? 그래야 그 업이 이 책에서 말하는 연출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업은 근원의 존재와 가까운 곳에 있을 것 같다. 그 업이 내 인생을 연출하고 지시하고 있다면, 그 업은 없어지지 않는 것일까? 영원한 것일까? 분명 육체를 지는 삶의 활동을 통해서 생긴것일텐데 어찌 없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혹시 이 업이라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아닐까? 내가 지금 당장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어떤 일을 대할 때 갑자기 솟아오르는 감정들 말이다. 또는 이유없이 감정이 느끼게 될 때도 있지 않은가?


명상 방법 중 하나에 의하면 그 감정을 온전히 느껴주는게 이 삶에서 육신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참고:김상운의 <왓칭1,2>,<거울명상>) 생각해보면 감정을 느껴준다는 것자체가 별로 연습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감정을 느끼기 부터 해야한다. 그 다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있겠다. 느껴봐야 그것들을 구분할 수 있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읽어보기:<강신주의 감정수업>)


그 다음으로 연기가 없는 삶.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고 했다. 연기가 없다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감정이 없는 삶이 아닐까?  순간을  순간으로 흘려보내는 것을 말하는것 같다. 이렇게 하는 것은 순간에 깨어있고, 마음을 알아차리고, 감정을 내려 놓는 것으로 표현할  있을것 같다. (다시 읽어보기:틱낫한, 카밧진, 호킨스, <세도나혁명>)


좋고 싫음의 너머에 있는  평원 있고 싶어진다.


“Out beyond ideas of wrongdoing

and rightdoing there is a field.

I'll meet you there.


When the soul lies down in that grass

the world is too full to talk about.”



― R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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