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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Mar 11. 2023

세일러 만년필

습관을 만들려면 작지만 큰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일기를 매일 쓰고 하루를 정리한 후에 잠자리에 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날에 얽혀있던 꿀타래 같은 감정과 생각의 뭉치는 작아지고, 남길 필요가 있는 것만 장기기억 또는 무의식 속 어딘가로 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후에 다음 날은 다시 깨끗한 머릿속과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기를 쓰려고 1년 365일의 날짜가 인쇄되어 있는 두툼한 A5크기의 몰스킨 다이어리를 샀다.

매일 쓰기는 했는데, 하루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떠오르는 몽상에 끌려다니기 일쑤였다. 다 써놓고 보면 횡설수설할 뿐만 아니라 다시 읽어서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일뿐, 마음이든 일상이든 말끔해지는 느낌은 없었다. 또한 하루 한 페이지로 분량이 정해져 있다 보니 더 길게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노트가 문제인 것 같았나 보다. 그래서 바인더 형태로 된 플래너를 마련했다.

플래너 회사에서 인쇄해 둔 칸에 맞춰 내용을 채워가면 일상이 정리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여러 가지 형태의 선이 그어진 노트 속지도 골라서 쓸 수 있어 글을 쓰기만 하면 통찰이 생겨날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런 속지들 중에서는 5mm 간격으로 선이 그어진 모눈노트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 칸 안에 글씨를 써 나가면 뭔가 정리되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플랜커스 플래너 속지 100g 모조지에 uniball UM-100으로 뭔가를 쓰는 게 정말 좋았다. 종이 위에 쓰이는 글씨를 보노라면, 마음이 시원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충만감이 느껴지기도 해서 만족스러웠다.


하루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을 기본으로 매일 챙기고 싶은 루틴을 항목별로 적어가며 일지처럼 썼다. 확실히 어제 한 루틴을 오늘 다시 눈으로 확인하는 것, 오늘 한 루틴을 손으로 적어두는 것은 자판으로 썼을 때의 객관적인 느낌보다는 실제와 더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고 그 달의 주요 사건과 새로 알게 된 것들 그리고 다음 달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서 한 달을 정리해서 써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써 놓은 일기와 노트들을 다시 시간을 내어 읽어보지 않는 한 삶이 직선으로 표현되는데에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살다 보면 삶이 나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물리학자는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하고, 어떤 깨달은 자는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고도 한다. 어쩌면 시간과 공간은 하나로 존재하므로 방향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 시간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시간의 길이는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며, 이 공간도 나를 중심으로 응축되기도 하고 의미 없는 배경처럼 흩어져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한 사건이 깨달음을 주고 지나갔다고 해서 그대로 끝난 것이 아닌 것 같다. 다음에 언젠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재현되기도 하고, 이번에는 또 다른 가르침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선형 삶을 조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했었다.


일기를 어떻게 나선형으로 써볼까 생각하다가 매년 같은 날의 일기를 모아서 써 두는 ’N 년 다이어리‘라는 것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책장에 있던 몇 년 전에 쓰다가 던져둔 3년 다이어리를 펼쳐보니 2018년의 어느 날 나는 Danielle Steel의 소설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뿌듯함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적어두었다. 그로부터 5년 넘게 지난 지금의 내가 보기엔, 그 후로도 원서로 된 소설책은 30권 넘게 더 읽었고, 미드도 각 에피소드 개수로만 치자면 백개도 넘게 봤으며 문법 책을 한 권 통째로 베껴쓰기도 하고 영어로 생활하는 나라에서 1년 반 넘게 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영어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만약 지금의 내가 2018년의 나를 보고 있었더라면 뭐라고 조언을 할 수 있었을까? 어차피 이렇게 경험해 봐도 영어는 늘지 않는 거라고 말했을까? 할 수 있는 한 영어를 많이 접하고 경험하라고 말했을까? 그것보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따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밖에 없다고. 결국 파랑새가 옆집의 새장 속에 있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파랑새의 좌표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5년 전의 일기를 보면서 다시 이런 일기를 시작하고 싶어졌다. 노트가 잘 펴져야 하고, 여러 종류의 필기도구로 무리 없이 글씨가 써져야 한다는 점. 인쇄된 내용이 심플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로이텀의 5년 노트를 세권 샀다. 내 삶은 항상 세 가지 영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톱니바퀴처럼 각 영역들이 잘 돌아가면 전체적인 삶이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각 영역에 대한 일기를 구분해서 쓰기 시작했다. 일, 가정, 개인. 일기는 주로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떠올리며 내면이 아니라 사건 중심으로, 내가 관찰한 일 중심으로 써 보고 있다.


밤에 일기를 쓰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읽은 책이나 생각을 반영할 수 없어서 끝이 애매한 하루가 되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나는 중요한 일은 아침에 하는 편이므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써보기로 했다. 일어나서 체중을 재고, 커피를 내려서 책상에 앉아 세 권의 일기장을 일, 가정, 개인의 순서로 펼쳐 쓰기 시작한다.


그저 그렇게 대동소이하던  하루하루가 점점 흐름을 갖는 것처럼 보이는 날들로 기록되어 갔다.


집에서 쓸 요량으로 별 기대 없이 구입한 날짜 도장은 일기를 좋아하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해 주었다. 4년 전에 인도에서 샀던 날짜도장을 회사에서 쓰고 있는데  그것에 비해서 글씨체가 가늘고 선명해서 깔끔했다. 그 깔끔한 날짜를 일기장에 찍고 하루 중에 기억나는 일들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그 좋다는 로이텀 노트도 내 펜들과 잘 맞아야 했으므로 매일 다른 종류의 펜들로 써 보는 중이었다. 플래너에서 그렇게 활약하던 UM-100은 여기서는 영 맥을 못 추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글씨를 보여주지도, 쓰는 느낌에 즐거움을 주지도 않았다. 이펜 저펜 쓰다가 어느 날 요즘은 통 안 쓰던 남편의 sailor 만년필의 사각거림이 신선한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은 EF촉인데도 내 것은 부드럽고, 남 편 것은 날카로웠다. 일기장에는 날카로움이 잘 어울렸다.


아무 생각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도 모르게 일기장을 펼칠 때, 파란색 세일러 펜을 찾아 글씨를 써 내려갈 때, 즐겁다. 사각거림이 사건들을 차분하게 내려놓아준다. 적당히 날카로운 사각거림이  차분함을 불러온다. 삶이 어디에 선을 긋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세일러 만년필로 선을 긋는다. 오늘은 그 선을 넘어가지만 1년 뒤, 2년 뒤, 5년 뒤에도 나는 다시 돌아오고 넘어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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