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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로등 Mar 02. 2024

일상에서 배워가기

가족 중에 꼰대가 있다.

마트 앞에 지나가다가 가판대에 붙어 있는 할인 안내판에 '양말'대신 '양맘'이라고 쓰여 있다. '양맘'? 이라고 내가 말하자 남편이 '좀 그냥 지나가..!'라고 한다. 

열 한 살 딸의 손을 잡고 있었기에, 아이에게 물어본다. '엄마가 좀 따지고 지적하고 해서 힘들때가 있지?' 잠시 생각하다가 '응' 이라는 답이 나온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아주 불편한 의무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시물을 검토를 한다면 저 정도의 오타는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타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므로. 하지만, 누군가는 오타는 예의랑은 상관 없고, 뜻만 전달되면 된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표현이 부정확한것을 가늠해서 알아 들어야 한다면 하물며 가격표는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또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가판대에 물건을 내어놓고 안내문을 붙일 때, 누구나 알만한 '양말'이라는 부분은 넘어가고 '가격'은 정확히 검토를 했을까? 그 부분이 실제와 다르면 소비자들의 불만을 응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말이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일관성 없는 모습은 나 같이 따지는 - 안내 문구에서 걸리면 물건은 보지도 않는- 잠재 소비자에게 참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판매자가 그런 실수를 했든 의도적 이었든 간에 이런 반응을 내 가족들이 불편해 한다는 것은 어딘가 나를 옥죄는 느낌이 든다. 

일상에서 뭔가를 깨닫고, 알기 위해 책과 신문을 늘 가까이 하고 있는 나는 대체 어떤 면에서 인식이 넓어지고 있는 것인지 도통 설명할 수가 없다. 머리로 아는것이 행동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 마음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신체, 마음,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편이 일상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신체는 생각과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고, 마음은 인식과 무의식으로 되어 있지 싶다. 영혼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일수도 있는데, 아마 집단무의식과 영혼이 서로 접해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떤 새로운 사실을 보거나 깨달았을때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면 그대로 흘러가버린다. 어느날 문득 비슷한 상황이 되면 떠오를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노트나 수첩에 적어두지만, 다시 읽어보지 않으면 그 또한 그 순간의 강화로 점을 찍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언행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때 불편한 마음이 생겨난다면 놓아버리지 말고, 일단 잡이두고 들여다 보는게 좋다. 나에 대한 자책이 끌려 나올 수도 있고, 어떤 지식을 끌어 올릴 수도 있다. 이번 일은 내가 언어의 정확한 사용과 그로부터 상대에 대한 존중을 연결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도 생각해 본다. 어디엔가 전문적인 의견을 펼쳐야 한다면 나의 인식을 인용할 수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아니라는 점도. 일상이 삶 자체이고, 그것은 일어나는 것들을 왔다가 가도록 열어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던 터다. 

마음이 좁아져서 인식과 행동도 그에 따르게 되면 '꼰대'가 되는 것이다.  그 말 이 주는 경계감은 굳이 타인에게 내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서로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점을 알아차리라는 일종의 죽비소리다. 

꼰대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다만, 많은 정보와 이야기들로부터 세상을 넓게 이해하고자 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나의 활동이 생활에 녹아들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연결점을 이렇게나마 모색해 보는 것이 진짜로 넓어지는 방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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