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었다.
드디어 며칠간 우중충한 회색 하늘에서 흩뿌리던 비가 멈췄다. 동쪽 하늘이 옅은 주황색으로 밝아지는 모습을 보는 건 안도감과 기대감을 일으킨다.
중간 관리자가 된 지 다섯 달 째다. 처음에 세웠던 목표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어 달성을 할 수 있을지 물음표가 되어 버린 것들이 많다. 차라리 그건 나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목표들도 막상 하려고 보면 하나같이 애매하고, 안갯속에 있는 것 같아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들여다보고 생각할 시간은 늘 부족하다.
리더십이라는 게 나와는 아주 거리가 멀고, 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해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까?
목표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달성되고, 문제들이 해결되고, 어떤 일이 생겨도 웃으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이해를 이끌어 내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면 나를 괜찮다고 여기게 될까? 글로 써 놓으니 이런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것을 바로 알겠는데..?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하고, 어떤 결점에 대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누구나 나를 대단하다, 잘한다, 좋다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내 탓으로 여기고, 나의 능력이든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부족한 인간이면 안되는가 자문해 본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왜 부족하면 안 되는가? 그것은 추하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왜 항상 아름다워야 하는가? 그래야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중요함은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하며 올림픽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어두운 밤, 주변을 살펴보지도 않고 땅만 보며 걸었다.
질문들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나는 '창피함'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망가지는 것이 가져올 수치심.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뭔가 울컥 하지만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흰 옷을 입은 어린아이를 떠올려본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자기 자신을 옭아매고 힘들어하는 한 아이가 있다. '괜찮아. 다 괜찮아.'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이를 안아주며 다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준다. '다 괜찮아?''그럼, 다 괜찮지.'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낯설다. 아이는 한 동안 그렇게 안겨있다가 나를 안아준다. 내가 해 준 것처럼 똑같이 '괜찮아, 다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등을 토닥여 준다.
만트라처럼 '괜찮아, 다 괜찮아'를 읊조리면서 계속 걸었다. 두 팔을 서로 감싸 안고 괜찮다고 말해본다. 어떤 논리나 설명을 붙이지 않은 채 무조건 말해본다. 점점 평온해진다. 어두운 밤길, 마주 오는 사람의 표정도 보이지 않지만 피해야 하는지 그냥 가면 되는지를 판단하지 않은 채 그냥 걷는다.
항상 누군가를 의식하는 것은 피곤했다. 누가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은 수십 년 된 느낌이다. 사건이라 할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흠집 없이 살려고 그랬던 것이다.
중학교 국민윤리 책에서 봤던 ‘신독(愼獨)’이라는 단어는 열세 살의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 이후로 삶의 모토로 삼아온 터다. 신독은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戒愼乎 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恐懼乎 其所不聞)”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스스로 두려워함이 지나쳐서 모든 것이 확인과 판단의 대상이 되고, 나를 수축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버리기만 한다면 이제는 이 단어와 조금은 멀어져야 할 것 같다.
'괜찮아, 다 괜찮아'
마음이 맑아지면 그다음은 또 다른 마음이 알아서 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