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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Mar 20. 2024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에 대하여

사람들은 말한다. 감정적인 사람을 피하라고. 그뿐 아니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감정을 드러내면 스스로 한심하다 여긴다. 살면서, 특히 직장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커밍아웃으로 여긴다. 그런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의 불쌍한 감정은 보자기에 꽁꽁 싸서 랩으로 감은 다음 냉동실 깊숙히 보관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생활을 할 수 없다 여긴다. 사회화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우는 과정으로 여기기도 한다.


감정을 드러냄에 대한 말의 기원까지는 모르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논어에 비슷한 말이 나온다. 희노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중’이라고 말했는데, 쉽게 기뻐하고, 쉽게 화내고, 쉽게 좋아하고, 쉽게 슬퍼하고, 쉽게 즐거워하면 고달파진다는  뜻과 연결된다. 공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대체로 무표정한 것은 2400년전 공자가 설파했던 감정을 드러냄에 대한 말과 연관있을 지 모르겠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과연 좋을까? 인생이 따분하고, 지겹고, 무기력해지는 것은 감정의 문제다. 엉덩이쪽 흔적으로 남은 꼬리뼈처럼 화석화된 희노애락으로 살아간다면 삶은 생기를 잃는다. 이성적, 논리적, 명철한 생각도 사실은 감정에서 비롯된다. 감정과 생각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은 감정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감정은 삶을 개선하고 지속하는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는 말은 감정을 느끼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의 문제다. 표현되지 않는 감정은 화를 부른다. 감정은 드러내지 말라는 말은 틀렸다. 감정은 잘 드러내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잘’ 드러낼 수 있는가다.


희노애락으로 상징되는 감정을 잘 드러내기 위한 전제가 있다. 감정을 잘 해석하는 것이다. 감정을 잘 해석한다는 것은 깊고 넓은 해석을 뜻한다. 깊고 넓은 해석이란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처럼 대립되는 감정을 서로 연결짓는 태도다. 슬픔은 나쁜 것이고 기쁨만이 좋은 것이고, 화를 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고 항상 웃어야 좋은 것이라라는 생각을 버려야 감정을 깊고 넓게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 중에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감정은 친구나 자식과 같다. 내게 4명의 친구, 4명의 자식이 있는데, 그 중 한 녀석만 노골적으로 좋아하고, 그 녀석과 닮지 않은 녀석은 무시하며 기를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 감정은 에너지인데, 분노도 슬픔도 삶에 꼭 필요한 좋은 에너지가 된다. 가난한 친구도 있고, 부자 친구도 있고, 내성적인 친구도 있고, 외향적 친구도 있고, 냉철한 친구도 있고, 따뜻한 친구도 있어야 내 삶이 풍성해진다. 삶에서 오직 기쁨만, 오직 성공만 바란다면 그 삶은 위태위태하다.


벽돌집을 지으려면 벽돌만 쌓으면 안된다. 벽돌과 벽돌을 단단히 붙여주는 시멘트가 필요하다. 부정적이라 여기는 것들은 시멘트와 같다. 편안함, 안락함, 즐거움만으로 만들어진 삶은 시멘트 없이 쌓은 벽돌집과 같다. 무너지기 쉽다. 시멘트의 속성은 섞임이다. 감정을 잘 드러낸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 들더라도 서로 상반된 감정을 잘 섞을 수 있는 능력이다. 감정을 섞는다는 것은 슬픔, 외로움, 분노 속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설렘과 따뜻한 마음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다면 감정을 자신과 타인을 위해 현명하게 잘 드러낼 수 있다. 말은 쉽지 실제로는 무척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연습하면 된다. 좋은 방법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찾아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숨은그림 찾기, 퍼즐 맞추기처럼. 세상에 100% 순수한 것은 없다. 100% 특정한 요소로만 이루어진 존재는 없다. 100%의 순수한 기쁨, 순수한 슬픔도 없다. 어떤 감정이든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다. 어떤 사람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공존한다. 나도 타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완벽한 기쁨도 완벽한 슬픔도 없다. 완벽한 아군도, 완벽한 적도 없다. 모두 똑같다는 것은 그 무엇도 관심을 가질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에도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성공한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으로부터 더 많이 배우듯, 긍정적 감정보다는 부정적 감정으로터 더 많이 배우듯,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로부터 더 많이 배운다는 생각이 필요한 시대다. 우리 시대의 감정은 돈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잘 살펴보면 감정이 풍부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돈도 많이 버는 듯하다. 감정을 잘 표현한다는 것은 쉽게 화내고, 쉽게 슬퍼하고, 쉽게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감정을 존중해 서로 잘 연결지어 너와 나를 위해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은 저주가 아니라 선물이다. 선물을 받으면 설레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열어봐야 한다. 무엇이 들어 있어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물의 본질은 연결이다. 너와 나의 연결, 기쁨과 슬픔의 연결, 좋음과 싫음의 연결이다. 대립되는 것들이 연결되어 서로 도움으로 연결될 때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오직 나의 안온함이라는 사이비 종교에서 벗어나 번거로움, 가난함, 소외되고 고통받는 존재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인간 삶의 본질은 타인에게 있다. 네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타인의 붕괴는 세상의 붕괴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타인을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 상식이 되는 교육은 이제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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