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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Jun 30. 2023

물개


1987년,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주거연맹(HIC) 총회가 열렸다. 그해 한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잔인하게 강제철거를 하는 나라’로 꼽혔다. 파일을 정리하듯 가난한 삶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휴지통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에 88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지강헌이라는 탈주범이 인질극을 벌이며 외쳤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1988년 9월의 어느 날, 부산 하단 낙동강 하구언 둔치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은 밤 9시경, 생일을 맞은 한 대학생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나는 영도 물개다!“라고 외치고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용감하게 수영하는 친구의 행동에 일행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치며 웃었다. 잠시 후, 헤엄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당황한 일행은 경찰에 신고했고, 자신이 물개라고 선언했던 대학생은 다음 날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내가 나고 자란 부산은 도심에 해수욕장이 5개 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가 떠오르는 다대포, 낭만의 바다 광안리, 바닷물 좀 아는 사람이 즐겨 찾는 송정, 달맞이로 유명했던 해운대, 한국 해수욕장의 원조인 송도다. 송도해수욕장은 한때 지금의 제주도였다. 60, 70년대에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다. 좀 더 차고 맑은 물에서 수영을 즐기려면 송정 위쪽의 일광, 월내, 진하 해수욕장을 찾았다. 부산 사람들이 5분에서 1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해수욕장이 8곳이나 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은 모래 해변만 포기한다면 풍덩 뛰어들어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어디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강이나 바닷가에서 "나는 영도 물개다!"라고 외치며 물속으로 뛰어드는 부산 사람을 가끔 본다.     

 

영도는 섬이다. 부산 남포동 맞은편에 있다. 1930년대 세계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도개교인 ‘영도다리’가 남포동과 영도를 이어준다. 한 시절 런던 타워브리지만큼이나 유명했던 영도다리를 건너면 섬으로 들어간다. 옛날에는 절영도라고 불렸다던 영도의 연안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계속 매립되었다. 내가 사는 영도 청학동에도 작은 백사장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수영을 즐겼는데, 80년대 초에 매립되었다 한다. 유명한 관광지 태종대가 있고, 국사 시간에 나오는 신석기시대 유적인 ‘동삼동 패총’이 있는 동삼동 해안도 계속 매립되어 도로와 아파트로 변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삼동 앞바다에 물개들이 살고 있었단다. 파출소에서 총을 빌려 물개 사냥을 종종 했다는 주민의 놀라운 경험담도 들었다.   

   

공원(park)이라는 말은 귀족이나 왕의 사냥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하이드파크는 1536년 헨리 8세가 만든 사냥터였다. 사슴과 토끼 등을 파크에 몰아넣고 사냥을 즐겼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의 한국은 서구 열강에서 온 사냥꾼들의 사냥터였다. 국권 침탈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진짜 사냥터였다. 그 당시 한국은 야생동물의 천국이었고, 한반도의 야생동물들은 인기가 많았단다. 같은 종의 표범이라도 한국에 사는 동물은 털빛과 문양이 무척 아름다웠단다. 특히 호랑이와 표범이 인기가 많았단다. 소문을 들은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스웨덴 등 많은 나라의 사냥꾼들이 한국에 와서 야생동물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일본은 아예 야생동물을 잡는 군대까지 조직했다. ‘정호군’이라는 범(호랑이와 표범)을 잡는 군대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한국의 야생동물을 죽였다.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 사는 동물들도 사냥했다. 동해에는 고래들이 많이 살아서 선조들이 경해(鯨海)라고 불렀단다. 국권이 침탈되던 시기에 서구 열강들의 포경선들이 동해의 고래를 거의 절멸시켰고, 같은 시기에 독도에 살던 바다사자인 강치도 일제에 의해 학살당해 멸종했다. 영도 동삼동의 늙은 주민이 증언한, 젊은 시절 사냥했다는 바다 동물이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39번 항구의 물개와 같은 종이었는지, 독도 강치였는지, 백령도에 서식하는 멸종위기종인 점박이물범인지 모르겠다. 공통점은 야생동물이라는 점이다. 8.15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사라진 야생동물에 대한 자료는 1억 5천만 년 전 공룡의 흔적을 찾기보다 힘들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 이후 국가 주도 야생동물 독살 프로젝트인 ‘쥐잡기 운동’이 2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로 인해 사람 주변에서 겨우 살아남았던 여우 같은 야생동물들은 멸종했다. 사람만큼, 아니, 사람보다 더 힘들게 살아온 이 땅의 많은 야생동물이 멸종했다. 겨우 살아남은 동물은 노루, 다람쥐, 청설모, 멧돼지, 까치, 참새 같은 동물인데, 모두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에게 유해조수란 일정한 개체수를 유지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들은 인간에 의해 관리되어야 하며, 특정 상황에서 인간 눈에 띄면 살해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생동물과 대척점에 있는 말은 동물원 동물이다. 동물원의 역사는 제국주의로 시작해 산업화로 절정을 맞이한다.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 경험의 중심에서 동물을 제거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러 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라고 예술 문화 평론가 존 버그는 말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그들이 침탈한 곳에 사는 원주민을 납치, 감금해서 그들이 사냥한 동물들과 함께 대중들에게 전시했다. 역사를 통해 바라보면 동물원이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동물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보는 야생동물과 동물원의 동물은 다르다.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아프리카 오카방고에서 살아가는 사자, 코끼리, 표범과 동물원에 갇힌 사자, 코끼리, 표범은 서로 다르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은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아무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털빛, 눈빛, 몸짓도 다르다. 같은 종이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다. 아프리카 고향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원주민의 삶과,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미국 루이지애나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채찍 맞으며 일하는 노예의 삶은 다르다. 노예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시키는 것만 해야 하는 삶이다. 노예의 삶이 지속되면 하고 싶은 것도 점차 사라진다.     

지난주에 한 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해야 한다는 의욕도 생기지 않아 학교에서 잠자는 친구들이 많단다. 어떤 수업에는 3분의 1, 어떤 수업은 절반, 어떤 수업은 거의 다 엎드려 잔단다. 잠자는 학생을 깨우는 교사들은 거의 없단다. 그들에게 학교란 강제적으로 와야 하는 공간, 무기력하게 잠자는 공간이란다. 현실을 잊기 위해 잠자다 깨어 공허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면 디지털 교육의 상징 전자칠판만 홀로 영롱히 빛난다. 동물원의 동물들과 학교 학생들이 닮았다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신의 이름으로 다른 민족을 학살하고 약탈했던 제국주의, 천황의 이름으로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삶은 일본 군국주의, 대학입시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교육은 공통점이 있다. 대상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 막연한 미래와 대단한 가치라는 그럴듯함이 빚어내는 ‘고유성’ 박탈을 학습모델로 만든 것이다. 

    

동물원의 동물을 볼 때 생기는 ‘왜 이 동물은 내가 알고 있는 동물보다 못한가?’라는 의문은 ‘왜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가?’로 확장되었다가 ‘왜 내 삶은 이런가?’로 수렴한다. 행복한 삶, 좋은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 각자의 다양한 고유성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직조되는 천 같은 개념이다. 오직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어두운 강에 몸을 던지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일은 하지 말자. 죽은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그 밤에 왜 웃통을 벗고 강물에 뛰어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산 사람도 말하지 않을 때가 많다.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 공부든 일이든 자신의 고유성 안에서 타인을 발견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재미를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처럼 물어야 한다. 잘났든 못났든 부자든 가난하든 하나밖에 없는 존재 본질의 고유성은 끝없는 의문과 질문으로 모습을 점점 드러낸다.      


사라졌던 동물들이 돌아오고, 동물원은 없어지길 바란다. 동물원 같은 학교, 직장, 사회도 함께 사라지길 바란다. ‘영도 물개’라며 스스로 동물임을 선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동물은 동물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너는 너답게, 나는 나답게 사는 길이 각자의 삶의 이유이길 바란다. 죽이고 때리고 가두고 비난하고 업신여기고 외면하지 않고도 그들과 함께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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