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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May 09. 2024

저스트 머시

뇌는 생각한다. 뇌가 생각대로 내가 조정당하는 것인지, 내가 생각하는대로 뇌를 조정하는 것인지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무조건 따라가기만 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되는 걸까? 떠오르는 생각을 객관적 비판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냥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이고, 그 생각을 평가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모두 한 자아가 하는 것인가? 내 안에 두 자아가 있는 것인가?

이 두 자아의 이름을 객관적 자아와 주관적 자아라고 부르면 어떨까? 객관은 진실에 가깝고 주관은 거짓에 가깝다. 사람들은 진심을 털어 놓으면서 이게 진실이라고 말하는데, 주관성이 강한 생각과 감정은 진실보다는 거짓에 가깝다. 속에 꼭꼭 숨겨 놓은 감정과 생각은 진실이 아니라 가장 왜곡된 주관의 민낯일 수 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누가봐도 범죄를 저지를 것 같은 사람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 사람이 살인자라는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듯 당연히 받아들일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그 사람은 살인자일까? 아닐까? 예전에는 빨리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우는 일이 허다했다. 이런 태도는 인간의 뇌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 나의 가치, 나의 신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단지 흑인이기 때문에 그에게 죄를 덮어 씌워 사건을 빨리 해결하려는 태도는 닮았다. 누군가와 격하게 다투어 보면 안다. 나의 감정, 나의 생각,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내 안에 꼭꼭 숨겨왔던 상처입은 감정들, 상대의 말이 기폭제가 되어 감정과 생각은 핵분열을 한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비난하고 공격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실, 내가 생각하는 가치, 내가 생각하고 믿는 것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흑인에게 죄를 덮어 씌우는 것 같은 일이 생긴다. 죄를 스스로에게 덮어 씌우기도 한다. 나는 어디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야, 살 가치가 없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저 놈은 인간이 아니야, 더 이상 사귀지 못하겠어, 함께 살 수 없어,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저 사람 때문이야…. 와 같은 생각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런 생각들이 타인을 향하는가? 자신을 향하는가일뿐이다.

사회적 상식이라는 그럴듯한 주관적 자아의 옷을 입은 생각은 타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자신 또한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 나쁨이란 진실과 다름을 의미한다. 나쁜 짓을 했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는 것, 좋은 사람인데 나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은 똑같이 나쁜 짓이다. 이런 태도는 삶을 살다가 스스로에게 범죄를 덮어 씌워 사형선고를 내린다. 갈수록 늘어나는 자살 문제는 이렇게 생긴다.

저스트 머시,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억울함하게 갇힌 사형수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다가, 진실을 밝히려는 용기를 내는 부분이다. 주인공 변호사는 다른 것 같아서 재심 청구를 해보기로 하는 장면과 재심이 기각되었을 때 그래도 진실을 되찾았으니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다. 진실이란 객관이다. 다수의 생각, 권위있는 자들의 생각이 객관은 아니다. 나의 생각 또한 객관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타자, 내가 생각하는 나 또한 객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되다 여기지만 사실은 진실과 한참 거리가 먼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모른다.

나의 소중한 생각과 무고한 흑인을 범죄자로 모는 생각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이 이 영화를 통해 얻은 확장된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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