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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Jun 18. 2024

능소화 새싹

가끔 뭔가를 보고 숙연해질 때가 있다. 그때는 생각과 말, 행동이 멈추고 단지 그것을 보는 행위에만 집중하게 된다. 매일 만나는 수많은 정보를 이기적이고 실용적 목적에 맞춰서 끝없이 처리하는 피곤한 뇌는 운동 후에 샤워를 하듯 가끔 정보처리를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게 만드는 장면이 필요하다. 멍 때리기는 그런 이유 때문에 탄생한다.


매일 오가는 달집 데크를 바라보며 짧은 멍때리기를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느꼈다. 감정으로도 생각으로도 행동으로도 표현되지 않는 뭔가다. 그래도 꼭 표현해야 한다면 숙연, 장엄, 겸손.. 그런 단어가 떠오른다.


6년 전에 나무젓가락 굵기에 20센티 남짓한 묘목을 3개 샀다. 능소화 묘목이었다. 잘못 샀나? 살아나기나 할까?라는 생각은 괜한 걱정이었다. 능소화의 생명력은 기이할 정도로 강했다. 능소화는 담벼락의 주인이 되었다. 올 봄 뿌리를 뜯기며 화분으로 옮겨심는 대참사를 겪어도 의연하게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보란듯이 행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데크아래에는 빛도, 흙도, 온전한 뿌리 한 조각도 없다. 그 희망없는 심연 속에서 발버둥치다 2,3미리 틈을 비집고 기어코 싹을 틔웠다. 인간을 존재케하는 근원적 힘이 신이라면 식물의 저 강인한 생명력이야말로 신이다. 지구에 식물이 사라지면 초식동물도 사라진다.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육식동물이 사라진다. 식물과 동물이 모두 사라지면 인간도 사라진다. 에너지의 원천인 먹을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보도블록 사이로 기어코 싹을 틔우는 잡초라 불리는 초록의 존재. 그 생명력이 인간 문명을 지탱하는 힘이다. 당연한 사실을 가끔 잊는다. 아니 자주 잊는다. 잡초를 무시해서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 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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