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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타인터뷰 Jan 07. 2025

계엄

9살때 계엄군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엄마는 9살 아이에게 말조심하라고 했다. 어찌나 조심해야 했던지 집안에서 속삭이며 말하는 것도 쉿!!하며 입을 막았다. 이듬해 광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 바람결에 들렸다. 1930년대에 태어난 엄마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 하고 싶은 행동을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끝장나는지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경찰과 군인, 앞잽이에 의해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의 삶이 끝장나는 것을, 해방 후에는 타인을 도우며 공공의 이익을 말하면 빨갱이로 몰려 죽는 것을, 박정희때는 정부가 무조건 잘한다는 말에 토를 달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것을 배웠다. 그녀의 유년시절, 청소년 시절, 20대 30대를 통해 배운 것은 자기 검열이었다. 불안감은 생존키트였다. 엄마의 삶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면 한순간에 삶이 끝장난다는 불안감으로 몽땅 타버렸다.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 속에서 아이들을 무사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입단속은 필수였다. 추풍령 시골 깡촌에서 산과 들을 뛰어놀며 천진난만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엄마는 80살이 넘어서도 말조심해라고 신신당부했다. DNA깊숙히 생각과 표현의 자기 검열 낙인을 상징하는 단어의 절정은 계엄군이었다. 엄마도 나도 그랬다. 9살 겨울, 부산 시청 앞에 탱크가 굴러다니고 계엄군들이 학생과 시민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던 시절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계엄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다. 50살이 넘어도 나는 항상 계엄군의 눈치를 본다. 이런 생각을 해도 되나?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이런 행동을 해도 되나?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핀다. 내 분노의 원천은 마음 속 계엄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 그 아이가 자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조차 잊어버린 어른으로 살아가는 나, 주위를 둘러봐도 대부분 그리 답답하고 한심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보이는 탓 같다. 흐르는 세월 따라 심연 속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은 계엄령, 계엄군이라는 말이 일상을 지배할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은 세상에 대한 무지와 빈약한 내 상상력 때문이다. 숨쉴때마다 계엄이라는 말이 공기 속 먼지처럼 입안으로 들어오는 2025년의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다.


계엄령, 계엄군이라는 단어를 중고등학생이 저희들끼리 사용하는 ’존나’나 ‘씨발‘ 같은 욕인이 아닌지 헷갈리는 일상 단어 정도로 여기는 선출직, 어공과 늘공들 때문에 입안이 텁텁하다. 일을 하지 않으면 노예의 손목을 잘라버렸던 레오폴드. 계엄이라는 말을 들으면 레오폴드가 내 앞에서 웃는 것 같다. 계엄을 공정과 정의의 칼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외침, 계엄을 문제해결을 위한 사소한 의견개진 정도로 여기는 대통령과 그런 생각과 행동을 지지하는 권력 가진 사람들 때문에 말문이 막힌다.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힘이 권력이다. 권력의 바람직한 행사란 강자가 아니라 약자, 도움이 필요한 이를 위해 쓰는 걸 말한다. 다섯 자녀들 중에 공부 잘하는 장남에게만 맛있는 것 챙겨주고 용돈을 두둑히 주고 나머지 아이들은 공부 못하고 말을 안듣는다며 방치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집에서 눈치보며 남은 생을 살아야 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계엄이 트랜드인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기분이 딱 그렇다. 가출을 해야 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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