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혁 Nov 19. 2015

그 빌어먹을 술문화

대학을 입학하고 오티라는 걸 했다. 2박 3일인가 강원도 어디로 놀러 가서 대학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려주는 취지의 행사였는데, 술만 더럽게 마셨다.


도착한 날부터 밤새 술을 마시고, FM이라고 하면서 자기소개를 시키고, 선배랍시고 후배들에게 술을 강권했다.

그때부터 난 잔머리가 잘 돌아가서 선배에게 술잔을 받고, 마시는 척만 하고 다 버렸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 오니 다들 KO가 되고, 아주 술이 샌 선배1과 동기1과 나 이렇게 3명만 남았다. 선배는 나보고 술을 참 잘 마시니 대학생활 잘 할 거라고 했다.


등신. 내가 그 밤에 술을 소주 한잔 정도 마신 건 몰랐겠지.


당연히 이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게 끝나고 나는 대학생활의 아주 기본적인 수강신청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1학년 1학기가 시작됐고, 과의 소모임이나 동아리 모집이 활발히 이뤄졌다. 면접이니 뭐니 하는 곳에 간 동기들은 술을 밤새워 마셨다는 무용담을 들려줬다. 나는 그런 모습이 너무 싫었다. 난 대학교에 술 마시러 온 게 아닌데 왜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 어떤 대학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나는 아웃사이더가 됐다.


2학년 때였던가. 동기들끼리 저녁에 술 한잔 한다는 연락을 받고 갔는데, 한 동기가 하는 말이 "와, 난 진혁이랑 입학하고 처음으로 술 마셔보는 것 같아." 그 정도로 난 그 어떤 술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군대를 다녀오니 학교에 아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선배도 모르고, 후배도 모르고, 동기들도 거의 모르고.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 하필이면 건설회사여서 내 상사들은 술을 너무 잘 마셨다.

매일 같이 '진혁 씨 가볍게 맥주 한잔 하러 가지'라고 하며,

1. 가볍게 맥주 한잔

2. 가볍게 소주 한 병

3. 가볍게 맥주 몇 병

4. 가볍게 폭탄주 여러잔

의 코스로 이어졌다. 매번 술자리에서 화장실에 가서 토해내기 일쑤였다. 이 사람들은 내공이 있어서 보통의 술자리 뺑기는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 다닐수록 몰래 술을 따라 버리는 스킬만 늘었던 것 같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나서 회사를 관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건 이 빌어먹을 술 문화였다.


그래서 내 대학생활이 꼬였느냐고? 전혀 아니다. 나름대로 알찬 대학생활을 했고, 대학 시절에 혼자 떠났던 해외여행에서 만난 여자와 연애하고, 결혼까지 했다.


회사를 관두고 경력이 꼬였느냐고? 전혀 아니다. 나름대로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재미나게 일을 하고 있다.


대인관계가 꼬였느냐고? 전혀 아니다. 정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 이 좋은 사람들은 나에게 전혀 술을 강권하지 않는다. 나도 이런 사람들과 갖는 술자리는 아주 좋다. 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서로 재미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내가 운이 좋아서 이런 걸 수 있겠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뒤틀린 술자리 문화가 만연하고, 등신 같은 꼰대들이 권력을 매개 삼아 술을 강권하고 있으니.


이런 문화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소소한 저항을 위해 이런 글을 남겨본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