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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쓱 Feb 14. 2021

설날에도 휴무 없이 영업했습니다

설날 연휴 동안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딱히 없었어요, 할머니 댁에 가기는 싫고, 집에 있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고 해도 저는 명절에 할머니 댁에 가지 않습니다. 

제가 없어도 가족이 많아서 빠지는 것이 크게 티가 나지 않고요, 도로가 막혀서 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에 오래 있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책방'이라는 합리적인 핑계도 생겼습니다. 

책방을 열고 처음 맞이하는 설이니만큼 손님이 올지 안 올지 모르니 매일 열어 놓아야 한다는 거죠. 

혹시나 손님이 너무 없으면 좀 일찍 닫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변수는 손님이 아니었습니다. 


명절 연휴가 시작되기 전 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습니다. 5시 반까지요... 

저녁 7시에 만나서 다음 날 아침 5시 반까지 국밥과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다음 날 책방 문을 열 때 숙취가 심하면 안 되니까 섞어마시지 않고 소주만 마셨어요. 

원래는 술을 마시고 친구네에서 자고 아침에 개운하게 올 생각이었는데,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5시가 넘었습니다. 잠깐 잘 거면 집에 와서 자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침 해가 뜨는 걸 보며 집으로 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7시 반이었습니다. 책방 오픈 시간은 오후 2시입니다. 

아직 시간이 충분했어요. 그래서 씻고 잤습니다.


잠깐 자고 일어나니 숙취가 엄청났습니다. 

사실 괴로워서 깬 거였습니다. 가방에 들어있던(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나는) '상쾌한'을 먹고 좀 더 잤습니다. 다시 일어나니 아까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았지만 부족해서 해장을 하러 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해장을 하고 싶어서 술을 마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장에 철저합니다. 

매운 해장국을 먹을 때 두피로 땀과 함께 알코올이 날아가는 느낌에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런데 이 날은 이상하게도 냉면이 끌렸습니다. 심지어 평소에는 무조건 비냉파인데 물냉면이 먹고 싶었어요. 


24시간 해장국만큼 따뜻한 곳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는 안산에는 '더 진국'이라는 24시간 해장국 체인점이 있습니다. 원래 안산 중앙동에만 있었는데, 재작년에 상록수역 앞에 생겼습니다. 여기는 해장국집이지만 숯불고기 냉면이 맛있어요. 고기는 '육쌈냉면'이 맛있지만, 냉면을 '더 진국'이 잘해서 언니와 저는 어디로 갈지 늘 겨룹니다. 저는 고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언니는 냉면을 중요시하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며 '더 진국'에 갔는데, 설 연휴라 영업을 안 한다고 합니다. 아니... 24시간이지만 연중무휴는 아니라는 건가요?


바로 옆에 꽤 괜찮은 순대국밥 집이 있지만, 전날에 안주로 순대국밥을 먹었기 때문에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굴의 의지로 스마트폰 지도에서 '냉면'을 검색했습니다. 오래 산 동네인데, 처음 보는 냉면집이 나왔어요. 새로운 맛집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반갑게 맞이하는 사장님의 얼굴이 너무 시원해 보였습니다. 마스크를 안 끼고 계셨어요. 당황스러웠지만 잠깐이면 뺐다가 다시 끼는 걸 까먹을 수도 있다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주문을 받고 밑반찬을 담을 때에도 마스크를 안 끼시는 겁니다! '설마, 설마'하며 계속 지켜보는데, 심지어 주방에서 일하시는 직원 분도 시원한 맨얼굴이었어요. 아... 냉면이 시원하기를 기대했는데, 왜 요리하는 사람이 시원한 건가요... 께름칙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찾은 곳은 24시간 해장국만큼 따뜻하지는 않아도 더 포용력 있는 '김밥천국'입니다. 이곳에서 고대하던 냉면을 먹었어요. 역시 상록수역 먹자골목 앞 김밥천국은 맛집입니다. 이 동네 최고 맛집... bb


드디어, 해장을 해서 책방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운한 속에 그렇지 못한 정신을 가지고 책방 문을 열었습니다. 

연휴 동안은 책방에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책만 읽기로 다짐했었거든요. 

그래서 책을 읽는데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손님은 없었고, 이모가 놀러 오셨습니다. 

이모가 가시고 다시 졸다 보니 문 닫을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손님이 없으면 문을 안 여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일단 정신 상태가 몽롱해서 저녁 먹고 바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다음 날, 설 당일이 되었습니다. 

오전에 엄마와 언니와 함께 친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속이 안 좋아서 밥은 안 먹었습니다. 

할머니 댁에서 나와서 근처에 예쁜 카페로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아직 못 깬 것 같은 술을 해장하기 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스콘(ㅎ)을 먹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속이 계속 불편하길래 점심으로 불닭볶음면을 사 먹었습니다(?)

2시가 되어서 출근을 했어요.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졸렸습니다. 

그러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정말 신기하게 손님이 오시니까 정신이 차려졌어요. 

반갑게 인사하고 커피를 탔습니다. 소설이 잘 읽혔습니다. 

손님들이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방전되었습니다.

또 정신 못 차리고 있다 보니 금세 퇴근 시간이 되었습니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장어를 구워주셨습니다. 

맛있게 먹고 잤습니다. 


설 연휴 마지막 날인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이틀 연속 밤 9시에 자서 오전 9시에 일어나니, 이제야 속이 다 풀린 느낌입니다. 

눈이 좀 뜨입니다.



연휴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이걸 영업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다음 추석에도 다 열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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