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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쓱 Mar 31. 2021

손님이랑 나누는 책 이야기

지난 금요일 저녁 7시 쯤 차례로 방문하신 손님 두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손님 1이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급하게 들어오셔서 금방 나가실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커피를 주문하실 때 앉았다 가시는지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셨어요. 아마 그냥 걸음이 빠른 분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저 들어올 때 거침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할 때, 현역에서 활동하는 선배의 연기 워크샵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걸음걸이가 얼마나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는지 배웠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한 언니가 말했습니다. "무늬, 너는 엄청 빨리 걷지?" 저는 그 말에 놀랐습니다. 실제로 저는 걸음이 느린 편이거든요. 아마 그 언니에게 제가 무척 급하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보였나봅니다. 


손님1은 들어올 때는 급해보였지만 서가를 둘러볼 때는 무척 느긋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주문을 할 때는 확실하고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잠깐 사이에 상대에 대해 이렇게 많이 생각한 게 음흉해보이나요? 늘 이렇지는 않으니까 걱정마세요. 저녁 7시까지 손님 없는 책방에 혼자서 앉아있었던 날입니다. 이런 날에는 아주 작은 단서를 가지고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어쩐지 눈길을 끄는 분이셨어요. 손님1은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책을 읽는지는 보지 않았어요. 손님들의 대화를 듣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야 할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 사이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손님2는 느긋하게 문을 여셨어요. 그리고 후루룩- 서가를 둘러보셨습니다. 엄청 빠른 건 아니고, 저희 책방을 찾는 손님들의 평균적인 속도였습니다. 손님2는 <몽 카페>를 손에 들고 카운터로 오셨습니다. 저는 신이 났습니다. 전날 출간된 굉장히 따끈따끈한 책이거든요. 굉장히 의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책방은 신간이라고 무조건 입고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읽어보거나 믿을만한 매체와 사람의 추천을 받은 책만 입고하니까요. <몽카페>는 '시간의흐름'이라는 출판사의 '카페 소사이어티' 시리즈 세 번째 책입니다. 첫 번째 책 <카운터 일기>와 두 번째 책 <단골이라 미안합니다>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어서 두 권 모두 책방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 번째 파리의 카페 이야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어요. 출판사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하고 출간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주문한 책입니다. 이 책을 오늘 사가시다니...! 감격의 순간이에요. 


당연히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손님2에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이거 어제 나온 책이에요. 저도 어제 읽었는데, 재미있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손님2는 "아~ 그래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골랐어요."라며 저의 흥분에 상냥하게 응답해주셨습니다. 거기에 신나서 저는 괜한 TMI를 또 흘립니다. "이 책 표지에 있는 여자는 페넬로페 크루즈래요. 오드리 햅번처럼 보였는데... 오늘 알게되어서요." 


정말 어쩌라고죠? 하지만 손님2는 "아, 진짜요? 와, 감사합니다~"라면서 사려 깊게 저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셨어요. 곧이어 손님 2는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책방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타셨어요. 아, 누군가 손님2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나봅니다. 느긋한 걸음걸이를 보고 오해했나봐요. 제가 붙잡아뒀던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손님1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습니다. 책 두 권을 들고 카운터로 오셨습니다. 느긋한 발걸음으로요. 손님1의 손에 들린 책은 한은형 작가의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와 다른 책 한 권이었어요. 마침 제가 앉아있는 카운터 위에도 한은형 작가의 책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놓여있었습니다. 손님1은 제가 읽고 있던 <안나 카레니나>을 가리키면서 저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안나 카레니나 어떤 출판사가 괜찮나요?" 아니, 이렇게 멋있는 질문을 듣게 될 줄이야. 갖고 있는 지식은 비루하지만 솔직함이 무기인 저는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민음사 것 밖에 안 읽어봐서 어디가 제일 괜찮은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세트가 있길래 이걸로 구매했거든요." 


손님1은 구매하려는 한은형 작가의 <당신은 빙하...> 책을 가리키며 다른 말도 하셨습니다. "아직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전인데 이 책을 읽어도 괜찮을까요? 책에 안나 죽는다고 스포가 있더라고요... ㅎㅎ" 우아아아아, 신나요! 손님1은 질문 잘 하는 학원이라도 다니신 걸까요? 그런 사교육이 있다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 저는 원래 안나 카레니나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한은형 작가의 책을 읽고나니 안나 카레니나가 읽고 싶어졌다고 구구절절 말하며, 스포 당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책을 옹호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님 1이 가셨습니다. 


표지가 오드리 햅번이 아니라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걸 말할 때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내가 살아있어서, 이걸 알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한은형 작가의 책과 <안나 카레니나>를 말할 때에는 짜릿했습니다. 책방 문을 닫고 걸어서 집에 왔습니다. 비가 오기 전이라 살짝 추웠지만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질질 끌면서 걸었습니다. 아 행복해. 내가 박무늬라서 다행이야. 죽을 때 이 행복 끌어안고 가고 싶어. 이런 문장을 중얼거리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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