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근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디 May 05. 2021

다시 써 보자

2021년 5월 5일 수요일

내 글씨체는 엄마의 것과 똑같다.


어렸을 적,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길 바랐음에도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해서만큼은 간섭하지 않았다. 방법은 내가 결국 알아서 찾아낼 거라 믿어주었던 것 같다.


그랬던 엄마가 유일하게 간섭한 영역이 있었다. ‘글씨체였다. 초・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글쓰기 숙제가  많았다. 일기, 독후감, 수필, 관찰일지지금처럼 PC 태블릿으로 수업을 듣던 때와 달리 대부분의 숙제가 손글씨를 매개로 진행됐다. 매번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면 거짓말이다. 하기 싫은 날에는 글씨를 대충 휘갈겨 쓰고 덮어버렸다. 그때마다 엄마는 귀신같이 나타나 덮인 공책을 다시 펼쳐보고는 말했다. "이건 다시  보자."


엄마가 말한 ‘다시 쓰기’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ㄹ을 갈겨써서 거의 z 모양으로 보일 지경일 때, 다시 각 획을 살려서 또박또박 쓰라는 것. ㅂ의 좌우 하단은 둥글게 뭉뚱그리지 말고 각을 살려 4번에 끊어 쓰라는 것. 그때는 정말이지 그게 너무 귀찮았다.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차마 말은 못 했지… 억누른 짜증만큼의 힘을 실어 연필을 꾹꾹 눌러쓰던 그때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만들어진 습관 덕분에 웬만해서는 글씨를 갈겨쓰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잘 쓰기까지 한다. 어른이 되어 손글씨가 필요한 프로젝트에 참여를 권유받아보기도 했고, 취미로 캘리그라피나 필사를 할 때도 큰 도움을 받았다.  


엄마는 옳았다. 글씨를 또박또박 쓴다는 건, 매사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였다. 얼마만큼 성실히 임했는지, 글씨체를 보면 알 수 있다. 엄마가 아는 딸의 성실한 면이 남들에게도 온전히 보일 수 있기를, 그래서 딸이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길 바랐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안다.


내일은 엄마의 생일이다. 엄마와 똑같은 글씨로 엄마에게 축하 편지를 쓰고 있으니 기분이 묘해서 적어본 오늘의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상상의 과소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