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드라인도 글이야!
브런치 공백기였던 2년 사이, 나는 'UX 라이터'가 되었다.(갑자기..? 그렇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한동안 해외 라이팅 가이드 사례를 미친 듯이 긁어모으던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고, 중간중간 해당 가이드들의 업데이트 내역을 확인해오기는 했으나 드라마틱 변화를 찾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6월 초 UX Writing Hub에 올라온, 'Top 16 Content Style Guides 2023 (and How to Use Them)'이라는 제목의 따끈따끈한 아티클이 눈에 띄었다. 표제가 암시하듯, 잘 만든 가이드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Intuit' 사례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좀 더 파고들어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스몰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자산 관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미국의 핀테크 기업이다. Intuit은 지속적 인수∙합병을 통해 영역을 확장 중이다. 개인 세금 신고 솔루션인 Turbotax,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회계・세무・결제 솔루션을 제공하는 Quickbooks, 개인 종합 자산관리 서비스 Mint, 이메일 마케팅 솔루션 회사 Mailchimp 등 핀테크에 기반한 다양한 솔루션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UX 라이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Mailchimp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이미 국내 많은 마이크로블로그를 통해서도 관련 사례가 소개되었으니 말이다. 주로 'UX 라이팅 가이드라인의 좋은 예'로 말이다. 나 역시 사내 라이팅 가이드를 만드는 과정 중, 특히 포맷 관련 지점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은 사례였다.
Mailchimp의 존재는 알았지만, Intuit에 대해서는 잘 몰랐음을 고백한다. 근데 Intuit, 이 회사가 글쎄, 생각 이상으로 UX 라이팅에 진심이었다.
디자인 시스템이라고 한다면 보통, UI 관련 가이드라인이 떠오른다. 실제로 컴포넌트와 UI 관점의 가이드가 많기도 하거니와, 내로라하는 해외 기업들의 디자인 시스템 역시 이 쪽에 포커싱을 맞춘다. 하지만 Intuit는 이름부터 '콘텐츠 디자인 시스템(Content Design System)'이다. 시스템 페이지에 들어가면, 상단에 아래와 같은 정의를 통해 페이지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우리의 콘텐츠 디자인 시스템은 콘텐츠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마케터, 개발자, Intuit을 위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를 제공합니다.’
1. '글쓰기'가 가이드의 일부로 포함되지 않고, '글쓰기를 위한 가이드' 그 자체임을 암시한다.
2. 서비스를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을 특정 짓지 않는다. '누구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보통 가이드 또는 시스템에서 'Foundation'은 '기초 요소'를 의미한다.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앞서, 구성원의 입장에서 꼭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들이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가이드라인을 접하면서, Foundation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지만, 그만큼 뻔한 이야기가 되기 쉬운 챕터라고 생각해 왔다. 당연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간결하게 쓰세요.'
'정확하게 쓰세요.'
'맞춤법을 지키세요.'
'부드럽게 쓰세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라이팅 가이드, 아니 모든 글쓰기 관련 지침서 중 99%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 단언한다. Intuit의 가이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구성이 아주 알차다.
Intuit에서 이 가이드라인을 만들게 된 계기, 일하는 방식 등을 코믹스 형태로 풀어놓은 파트다. 옳은 콘텐츠 전략이란 무엇인지, 사용자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고민했던 시간들을 재미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한 점이 눈에 띈다.
많은 기업들이 각각의 비전과 목표로 멋들어진 슬로건과 이미지로 표현하고는 한다. 그런 방식이 불문율처럼 느껴지던 차에 이 챕터는, 일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일 자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운다. 아무리 멋진 아이디어나 슬로건도, 매력적이지 않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이 챕터는 필연적 독자인 팀 구성원이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동시에, 부가적 독자인 일반 대중이 Intuit을 궁금하게 만드는 포인트까지 잡은 사례다.
여타 가이드라인으로 따지면, 'Principle'에 가까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고객과 관계를 쌓고 유지하는 것을 기본적 목표로 두고,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떻게 쓰는 것이 적합한지 세부 원칙-설명-Do&Don't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 비즈니스 골 보다, 사용자가 얻을 혜택을 중시하라. (Put customer benefits above business goals)
- 톤을 조심해서 사용하라. (Watch your tone)
- 최상급 관련 표현을 조심하라. (Beware of superlatives)
- 마이크로카피를 최대한 활용하라. (Make the most of microcopy)
- 개인화하라. (Personalize)
- 옳은 일에 기뻐하라. (Delight when it’s right)
-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거나, 조작하지 마라. (Don’t shame or manipulate)
모든 문장에서 세심함이 느껴졌지만, 그중에서도 '최상급 관련 표현을 조심하라'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한국어에도 '가장', '제일'이라는 표현이 있고, 한자 '最(가장 최)'가 포함된 표현도 상당히 많다.'최고', '최강', '최신'... 플랫폼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말들이다. 모든 서비스들이 저마다 자신이 '최고'의 서비스이며, '최신'의 콘텐츠를 '가장 빠르게' 전달한다고 말하기에, 사용자는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지 오래다. 후발주자나 팔로워는 온데 간데 없는, 웃지 못할 사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이 최고라고 말하는 가운데에서, 그 외의 가치를 피력할 수 있는 서비스가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시기는 올 수밖에 없다. Intuit은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논리를 제시한다.
'당신이 스스로의 제안과 반대되는 것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면, 당신의 제안은 과장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스스로의 제품이나 서비스 중 하나가 '저품질'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고품질'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나머지 소챕터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About this site: 사이트의 존재 의의에 대해 설명한다.
The Basics: 콘텐츠를 더 잘 쓰는 12가지 규칙에 대해 다룬다.
Content strategy 101: 글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콘텐츠 전략의 기초에 대해 이야기한다.
Content testing: 콘텐츠 테스트 방법론을 다룬다. A/B 테스트, 카드소팅, 인터뷰 등 상황에 따라 어떤 테스트가 적합한지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Tools and apps: 직군별로 필요한 도구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위키, 슬랙, Ap 스타일북, 사전, 피그마, 어도비 등)
Writing small: 한국어에 적용하여 생각하면 '간결하게 쓰기' 정도로 볼 수 있다. 영어 특성상 한국어에 적용하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기본적인 원칙 자체는 모든 언어 체계에 해당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이팅 가이드의 Foundation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기 쉬운 챕터다. 라이팅 가이드 자체도 마찬가지다.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한 자료량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UX 라이팅은, 단순히 UI에 글을 넣는 일이 아니고, 글을 잘 쓰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도, 끄덕일 수밖에 없는 논리도. 무엇 하나 빠져서는 안 된다. 글을 쓰기 위한 가이드라인 역시 사람이 읽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Intuit의 가이드 구성은 몹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출처
'Top 16 Content Style Guides 2023 (and How to Use Them)', UX Writing Hub, 2023. 06.
'꾸준한 핀테크 성장주 인튜이트', 매거진한경, 202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