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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

by 김알옹

난 돈 욕심 집 욕심이 별로 없고, 아내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평생 살까 생각하고 있다.


10분쯤 걸어가면 한강이 나오고, 15분쯤 걸어가면 산이 나온다. 지하철역도 10분쯤 걸어가면 되고, 아이 학교도 다 그 반경 안에 있다. 동네에 유흥시설이 없고 술집마저 별로 없다. 동네 주민들도 모난 사람들이 별로 없어 보이고 아이가 다닐 학교들도 애들이 착한 편이어서 학폭 등 골치 아플 일이 많이 없다고 한다. 결혼하고 1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살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걸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우리 동네 도서관은 정말 좋다!! 동네 부동산에서 들으면 뜬금없다고 할 만한 도서관 자랑이 왜 등장하는가.


집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가면 메인 도서관이 나온다. 이 도서관은 서가에서 한강이 보인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면 작은 도서관이 또 있고, 반대 방향으로 10분 정도 가면 스마트 도서관이 있다. 관내 8개의 도서관의 책들을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상호대차를 하거나 예약을 하고 며칠 기다리면 스마트 도서관에서 찾아갈 수 있고 반납 또한 가능하다. 온라인 시스템은 사용자 친화적으로 잘 구축되어 있고, 보유 장서 수도 굉장히 많을뿐더러, 종종 양질의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모두 무료다! 내가 낸 세금이 이렇게 좋은 독서 환경을 구축하는 데에 쓰인다니 정말 뿌듯하다.


책이 인생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나에게는 최상의 환경인 셈이다. 물론 더 좋은 도서관 환경이 구축된 지역도 있겠지만, 분명 그런 동네는 집값이 비싸거나 직주근접성이 떨어질 거다. 돈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한데 더 열심히 일하거나 투자로 성공할 자신은 없기에 그냥 지금 동네에 만족하고 살고 있다.




지금까지 관내 도서관에서 수많은 북토크가 열렸다. 주로 소설가 분들을 모셔서 진행하는지라 소설 위주의 독서활동을 하는 나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지만, 일단 시간이 평일 저녁이라 여의치 않기도 했고, 작품만 읽으면 됐지 작가님까지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김애란 작가님의 북토크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과 <안녕이라 그랬어>를 재미있게 읽으며 중견 작가의 끝없는 노력에 감탄했던 기억에 대뜸 참가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른 도서관들의 프로그램들을 둘러보다가 이 책의 공현진 작가님 북토크를 발견하고 또 참가신청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의 북토크 참여라니! 책 읽는 즐거움이 한층 깊어지겠지?


동네를 공개하긴 좀 그래서 해당 정보는 지웠음 (출처: 우리 동네 도서관)


어느 평일 저녁에 재택근무를 마치고 도서관 강당으로 갔다. 공현진 작가님은 마치 학원 선생님 같은 강의력(!)으로 표제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창작 배경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국문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고, 다문화 관련 연구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신다는 말에 뛰어난 강의력의 원천을 이해하게 됐다.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미친 듯이 공부하는 선자 씨의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읽었는데, 실제 작가님의 이모님이 그 자격증 공부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소설을 쓰셨다고 한다. 한창 재미있는 사연을 풀어주고 계시는데 갑자기 아이한테 전화가 온


"아빠... 나 학원 앞에 자전거 세우다가 넘어졌는데 너무 아파... 걷기 힘들고 수업도 못 듣겠어..."


집에서 도서관은 10분 거리, 학원은 집과 도서관 딱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와... 작가님 강연 진짜 재미있는 부분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눈물을 머금고 바로 뛰쳐나와 학원으로 달려갔다.


일단 수업에 들어갔던 아이가 교실에서 나오는데 씨익 웃으며 나온다. 크게 다치진 않았고, 그냥 요즘 학원 숙제가 과하게 많고 내용도 어려워서 오늘은 수업을 듣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래, 그런 날이 있지... 아빠도 어릴 때 학원 가기 싫어서 땡땡이치고 오락실 가서 격투게임하다가 어머니한테 걸려서 집까지 격투게임처럼 맞으며 끌려갔던 아픈 기억이 있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걸어간다. 조금 절뚝이는 것 같았던 아이는 아빠가 어릴 때 맞으며 끌려간 얘기를 들으며 낄낄대더니 어느새 멀쩡하게 걷는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소제 뺨 때리는 꾀병이다. 아예 도서관이 집에서 엄청 멀었으면 "어... 아빠 지금 바로 갈 수가 없는데 어쩌지?"하고 난감했을 텐데, 작가님 북토크를 끝까지 못 들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이랑 함께 귀가하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아, 공현진 작가님 소설 참 좋다. 너무 극단적인 시선도 아니고, 너무 몽글몽글하고 안온한 시선도 아니고, 다른 작가님들이 안 다루는 이주노동자, 환경 등의 문제를 다루는 시선이 꽤나 신선하다. 앞으로의 집필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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