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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J. 헨리

by 김알옹

스무 명의 한국전쟁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를 회고록, 전기, 일기, 편지, 한국과 미국에서 진행된 개인 인터뷰, 기밀 해제된 기록문서 및 기타 자료 등 다양한 출처에서 발췌해 한국전쟁 전체를 그려낸 역사서. 작가는 미군이 1950년 7월 말, 노근리 근처에서 250여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1999년에 세상에 알려 퓰리처상 탐사 부문을 수상한 AP통신의 대기자이다.


제목인 'Ghost Flame'은 저자가 한국의 시골 사람들이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혼불이 깜박이는 것을 봤다는 말을 듣고, 이 전쟁에서 죽어 편히 잠들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을 위해 붙였다고 한다. 이 책의 부제인 <한국전쟁의 은폐된 삶과 죽음>과 같이 숨겨진 진실을 조망하며 수많은 희생을 추도한다. 미국인이 쓴 책이지만 남한,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며,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쟁의 긴 흐름에 엮어나가는 서술방식이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게 도와준다.




노근리 학살에서 두 아이를 잃은 생존자 박선용, 북에서 태어났지만 남으로 내려와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던 10대 소녀 장상(추후 이화여대 총장이 된),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미그기로 수없이 많은 공중전을 거친 북한 공군 조종사 노금석(정전 후 1953년에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 노근리 학살에서 무고한 양민들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그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미군 장병 버디 웬젤, 북한 고위 군사 지도자 유성철(정전 후 얼마 안 돼 숙청), 중국 인민군 사령관 펑더화이(문화대혁명 중 숙청), 전투 중 포로로 억류되어 있다가 공산주의에 감화단 미군 흑인 장병 클래런스 애덤스, 치열한 고지전들을 거치며 영웅적인 활약을 통해 훈장을 받지만 한국전쟁에 회의를 품은 미군 장교 피트 맥클로스키, 지리산 빨치산으로 긴 시간 활동하다가 결국 사로잡혀 최장기 미전향 장기수가 된 북한 공산주의자 리인모, 하버드를 그만두고 조국을 위해 귀국하여 2년 동안 끌어온 정전 협의 막판에 투입되어 통번역을 맡은 엘리트 중국인 지자오주, 맥아더를 이어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10대 후반의 의사를 꿈꾸는 소년이었으나 전쟁을 거치며 어른이 된 국군 위생병 정동규, 의학박사임에도 종교적 사명으로 피난민이 1백만 명 넘게 몰린 부산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개선하려 애쓴 수녀 메리 머시(부산 메리놀 병원의 초대 원장) 등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3년 4주 4일간의 치열한 한국전쟁을 풍성하게 그려냈다.



각 인물들의 나이는 1950년 6월 25일 기준이다. (출처: 19p~23p)


모 집단에게 '국부'라 추앙받는 이승만은 전쟁 발발 직후 한강교를 폭파시키며 서울에 남은 자들을 북에 희생시키거나 협조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보도연맹 사건 등을 통해 자국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서슴없이 내린다. '흰 옷 입은 사람들을 정리'하라는 미군의 작전에 뭐라 항의하지도 못하고, 전쟁 후반엔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홀로 북진통일을 주창하며 정전이 지체된다. (물론 정전협상은 미군과 중국군이 포로 교환 및 휴전선 문제로 지체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협상 시작 후 무려 2년이 걸렸다. 2년 동안 희생된 인명은 셀 수 없다.)


1차대전의 참호전도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킨 끔찍한 형태의 전투 양태이지만, 한국전쟁의 고지전 또한 전세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자고 일어나면 고지의 주인이 바뀌어 있을 정도로 군사를 쏟아부으면서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다. 러-우 전쟁에서 보듯이 현대전은 드론을 사용하는 고도화된 전투를 치르지만 여전히 보병을 투입해서 화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우리 국토를 전장으로 한 전쟁이 또다시 발발한다면 아무리 현대전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민간인의 희생이 동반되는 인명피해는 불가피하다. 엄연히 '주적'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체제가 붕괴될 조짐이 아직 보이고 있지 않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쟁이 또다시 벌어질지 모른다. 국제적으로는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 직접 경험하지 않는 젊은 세대에겐 <국제시장>이나 <태극기 휘날리며>등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만 남는 영화를 통해 그 비극적 역사가 폄하되기도 하지만, 남북한 민간인만 2백만 명이 넘게 죽은 끔찍한 전쟁의 기억은 어떻게든 잊혀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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