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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 Mar 29. 2020

La pianiste(2001)

Psychological Film Special ③ :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 지을 수 없는 유아기를 보내는 중년의 여성에 대하여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 대한 글임을 밝히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는 전혀 다른 영화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피아니스트>는 1983년 오스트리아에서 발표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를 각색한 작품으로, 은폐된 상처들을 추한 모습 그대로 직시하는 소위 ‘하네케 스타일’을 영화 전반에 드러냅니다. 또한 영화는 주인공 에리카의 묘사를 통해 인간 존재와 인간적 현실의 의미를 탐구하는 실존주의적 영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집요하게 묘사되는 ‘에리카’를 중심으로 영화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Director

Michael Haneke

Erika Kohut

isabelle huppert

Walter

Benoît Magimel




  영화는 ‘그녀는’으로 시작한다. 30대 중반의 그녀는 퇴근 후 집에 귀가하자마자 노모에게 추궁당한다.  노모는 밤늦게 들어온 그녀를 질책하고, 그녀는 그런 노모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곧이어 그들은 눈물 흘리며 서로에게 사과를 건네고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든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게 기이한 모습을 띤다.

 학교에서는 실력 있는 교수인 그녀를 따라가 보면, 그녀는 집 욕조에서 자학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DVD방에서 정액이 묻은 휴지 냄새를 맡는 악취미를 가진 여성임이 드러난다. 

 이어 영화는 그녀에게 반한 월터를 등장시키며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전개시키나 하더니 그녀의 사도마조히즘적 취향을 드러내며 장르를 비틀어버린다.



 에리카는 월터가 자신의 제자 안나와 친밀한 모습을 보이자 질투심에 안나의 코트 주머니에 유리 조각을 넣어 안나의 손을 다치게 만든다. 그리고는 자동차 극장에서 타인의 정사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요의를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간다. 월터는 안나의 손을 다치게 한 것이 에리카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에리카가 있는 화장실로 가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그러나 그녀는 월터를 안달복달하게 만들며 그를 조종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때 그녀는 월터의 성기를 깨무는 이상행동을 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정신 분석학에서 6개월에서 2세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심리성욕 발달의 구강-가학적 단계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관객들은 30대 중반의 그녀가 정신적으로는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30대 중반의 그녀는 5분마다 전화하는 엄마가 있다. 그녀는 잘 운다. 그녀는 질투심에 남을 괴롭히는 걸 서슴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실력 있고 교양 있는 피아노 교수인 그녀가 집에서는 흡사 노모의 갓난아기이자, 남편 역할을 하고, 학교와 집의 울타리 밖에선 타인의 정사를 훔쳐보며 소변을 배출하는 등 변태 성욕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화장실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 월터는 그녀의 집을 찾아간다. 그녀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그 집에서 방 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가 월터에게 쓴 편지를 읽는다. 그녀는 침대 밑에 숨겨둔 채찍과 안대, 밧줄을 꺼내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한다. 그녀의 변태성욕을 눈치챈 월터는 그녀에게 당신은 미쳤다고 말하며 그녀를 떠난다. 버려진 그녀가 돌아갈 곳은 엄마의 품뿐이다. 엄마에게 돌아간 그녀는 그녀를 비난하는 엄마에게 억지로 키스한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아이의 모습을 한 채로 서럽게 운다. 이처럼 그녀는 학생들 앞에선 시종일관 초연해 보이는 엄격한 교수처럼 비춰지지만 실은 성적 억압과 외로움을 지닌 아이로 묘사된다. 그러나 (여타 전작들과 비교해 봤을 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그러한 그녀의 미숙함을 이해하고 감싸 안을 인물은 아니다. <피아니스트>는 여타 다른 영화들처럼 주인공을 애써 이해하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는다. 노모의 추궁에 폭력을 가한다거나, 질투심에 학생의 코트에 유리조각을 넣어 상처를 입히는 행위의 연출은 어떻게 보더라도 그녀에게 연민을 갖게 하지 않는다.


 에리카는 매몰차게 그녀를 떠난 월터를 찾아간다. 사과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아이처럼 그녀는 편지의 내용에 대해 미안하다 말하며 다짜고짜 그의 바지 지퍼를 열어 성교를 감행한다. 그녀는 사랑받고 싶고, 그러한 행동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고 그에게 매달린다. 곧이어 구강성교 중 그녀가 구역질을 하자 월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화를 내고 떠난다. 

 그리고 영화는 ‘그녀는’으로 끝난다. 월터는 에리카를 다시 한번 찾는다. 월터는 에리카가 편지에 쓴 것처럼 노모를 방에 가두고 에리카에게 폭력을 가해 눕힌 후 성교를 감행한다. 에리카가 요구한 것이니 에리카도 만족해야 마땅하지만 에리카는 눈물을 흘리며 그만하라 말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억지로 성교를 감행 후 그녀의 집을 떠난다. 

 다음 날 그녀는 칼을 가방에 넣고 연주회장으로 향한다. 학생들과 관람객들의 인사에도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월터일 것이다. 곧 월터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지나간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월터에게 꽂혔어야 할 칼을 그녀의 어깨에 꽂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놓인 여러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간다. 


 감독은 에리카를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으로 구별하지 않고 가피학을 모두 지닌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구분 지을 수 없는 유아기의 인간을 성공적으로 묘사해냈다. 그녀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엄마의 울타리를 벗지 못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잘못된 훈육에 그 흔한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찌르기에 이른다. 그녀가 보여준 모든 행동들이 성숙하지 못해 벌인 일이라 해도, 그녀는 결국 그녀의 벌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설 속 에리카는 다시 엄마를 찾아갔지만 영화 속 에리카는 울타리를 벗어나듯 겹겹이 쌓인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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