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은 까미노 프리미티보
길은 선(線)입니다. 까미노는 선이라서 생기는 독특한 정서와 맥락이 있습니다.
차원의 축소
빌바오나 오비에도 같은 대도시는 3차원입니다. 동서남북은 물론, 건물 옥상까지 xyz 축으로 다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바로 1차원입니다. 앞뒤로 줄어든 공간, 산을 오르고 내리지만 길에 붙어 갑니다. 높이와 좌우는 선택이 아니고 길에 순응할 뿐입니다. 도시에서 길로 차원이 축소되고 옵션이 사라지는 것에 익숙해지면 뜻밖에 마음에 평화가 생깁니다.
길은 시간의 투영(projection)
까미노, 1차원 세상에서는 시간이 길에 그대로 매핑됩니다. 1시간 전에 출발한 사람은 4km 앞에 걷고, 30분 전에 출발한 사람은 2km앞에 있습니다. 탁트인 시골 길에서 순례자의 과거와 미래가 시각으로 가시화 될 떄 신비롭고,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시공간(spacetime) 복합체
까미노는 시공간으로 의미가 생성됩니다. 까미노 친구들 때문이죠. 예컨대 6월 5일 오비에도 출발한 사람과 6월 6일 오비에도 출발한 사람은 완전 다른 세상을 봅니다. 같은 살라스 마을을 지나더라도 전혀 다른 경험을 합니다. 왜냐면 까미노 친구들이 일종의 기수마냥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절실히 깨달았던건 루고였습니다. 아름다운 도시라 저희는 하루 더 묵었는데 이후로 길이 낯설어져 버렸습니다. 친구들은 하루 앞에 가 있고, 제 곁엔 하루 늦게 출발한 순례자들이 걷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학생 느낌입니다. 까미노가 플랫폼이고 컨텐츠는 사람이란 결론도, 이 지점에서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