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은 강하다
수업 시간에 시를 다루고 있다. 교과서를 펼치기 전에 노래를 듣고, 시를 살펴보고, 개념 학습을 했다. 형성평가로 시를 읽고, 들려주며 시적 상황과 화자를 찾아보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를 배우고, 암송의 기회를 가졌다. 시를 외우면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와닿지 않던 표현도 실감할 수 있으며,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고 꾀었다.
올해 만난 중2들은 시를 외우랬더니 정숙한 분위기에서 각자 시를 외웠다. 중학생만 이십 년째,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 반만 그런가 했는데 다음 반에서도! 다음 주 여덟 반의 분위기는 어떨지 모르겠다. 다 같이 낭송하기도 하고, 짝과 함께 외워보라고 시키기도 해서 시끌시끌 중얼중얼 시를 읊조리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반에서 세네 명이 암송에 도전했고, 난 그들에게 상점을 주었다.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 할애해서 이런 시간을 조성했는데, 왜 시를 외워야 하냐 묻는 아이도 있었다. 시를 한 편 외워두면 언젠가 여러분이 비슷한 상황에서 시를 떠올릴 수 있다, 시가 주는 위로가 분명히 있을 거다 안내했다. 그리고 토요일인 오늘 아침 내 선언이 이루어졌다.
우리 집 고양이 겨울이가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 진작부터 남편이 휴가를 내야겠다고 해서 유난이라 여겼다. 수술은 15분 걸린다지만 마취 회복하는 데에 두 시간 걸린단다. 12시 넘어 집에 온 겨울이를 나는 네 시가 넘어서야 만났다. 넥카라를 하고 비척비척 걷는 겨울이는 한눈에 보아도 안쓰러웠다. 먹지 못한 배는 홀쭉해서 다리뼈가 다 드러났고, 뒷다리에 힘이 없는지 자꾸만 쓰러졌다. 암컷은 개복수술을 한다는 것도 나는 몰랐다. 포비돈액이 묻은 털 깎인 배, 실밥을 보니 남편이 오후 내 지켜봐 준 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안 그러던 애가 사람 몸에 꼭 붙어서 까무룩 잠들고, 깨어있을 땐 넥카라 때문에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비틀거렸다. 점프도 못하고. 오늘 아침엔 기운을 회복해 점프도 했지만, 좋아하는 그루밍을 못해 답답한지 계속 넥카라를 핥고 뒷발로 넥카라를 긁어댔다. 급기야는 자기 혀가 닿지도 못하는데 몸 여기저기를 핥는 듯 넥카라 채로 주억거리며 핥는 시늉을 멈추지 않는다.
시 하나가 생각났다. 정호승 시인의 '혀'라는 시다. 어미개가 갓 태어난 새끼를 핥는데, 약하게 태어나 죽은 줄도 모르고 연신 핥는다는 내용이었다. 죽은 새끼를 거두어 갔는데도 계속해 허공을 핥다가 어미개의 혀가 닳았다는 시. 이 시를 읽었던 때는 첫째를 임신 중이던 1정 연수 때. (와, 몇 년 전인 거야. 큰애는 고1입니다.) 연수 후반 일정 중에 정호승 시인님이 강연을 오셨다. 몇 편의 시를 낭송해 주셨는데, 저 시는 유명하지도 않았고 특별하다는 인상도 없었다. 다만 시인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다.
오늘 아침 핥아지지도 않는데 제 몸을 핥는 몸짓을 계속하던 겨울이를 보다가, 문득 제목과 함께 저 시가 떠올랐다. 십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시의 심상이 강렬한 탓이리라. 앞서 말했듯 학생들과 시를 공부할 때마다 얘기하곤 하는 게, 지금 이 시가 언젠가 여러분에게 위안을 줄 수도 있다는 메시지다. 그런데 그 메시지가 거짓이 아님을 내가 오늘 살아낸 거다. '혀'라는 시는 암송하던 시도 아닌데 어쩜 이렇게 이미지가 되어 생각나는 것인지. 시가 가진 힘이 대단하구나 실감했다.
시에는 모성이라는 큰 주제가 들어있지만 겨울이와 시를 동시에 떠올리니 이런 문장이 생각났다. '헛되지만 계속할 수밖에 없는 몸부림도 있는 것이다'하는. 우리네 삶도 다르지 않겠지.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 아들에게 하는 잔소리도 그렇고, 분리배출도 그렇고, ...... 추모행사도 그럴 터.(요새 읽고 있는 <아무튼, 데모>를 빼놓을 수가 없다.) 되돌릴 수 없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도 할 수밖에 없는 몸부림들을 응원하련다. 겨울이가 하는 가짜 그루밍에는 넥카라 안으로 손을 넣어 여기저기 긁어주고, 아들에게 언젠가 가닿을 좋은 말들(꼭 좋은 말들을 해야겠다. 명령 혹은 금지어 말고.)도 엄선해서 들려주고, <아무튼, 데모>도 읽고 여기저기 알려야지.
시간을 훌쩍 넘어 생각난 시에 대해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줘야지. 내가 정말 겪었다니까, 잊고 있던 시가 갑자기 생각났어. 5월 가정의 달 기념으로 시를 하나 더 소개해야겠다. 그럼 아이들은 이렇게 물을 거다.
"선생님, 그 시 시험에 나와요?"
당장 아이들에게 가닿지 않더라도 나는 자꾸 그들의 감성을 자극해야지. 언젠가 시를 떠올릴 미래의 그들을 응원하며.
<혀> 정호승
어미개가 갓난 새끼의 몸을 핥는다
앞발을 들어 마르지 않도록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온몸 구석구석을 혀로 핥는다
병약하게 태어나 젖도 먹지 못하고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죽은 줄도 모르고
잠도 자지 않고 핥고 또 핥는다
나는 아이들과 죽은 새끼를
손수건에 고이 싸서
손바닥만 한 언 땅에 묻어 주었으나
어미개는 길게 뽑은 혀를 거두지 않고
밤새도록 허공을 핥고 또 핥더니
이튿날 아침
혀가 다 닳아 보이지 않았다.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