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망했지 뭐야
시험지를 받아보고 놀라고 말았다. 네 영역 아홉 문제 중에서 두 문항에 답하면 되는 거였다. 한 문제 당 100점.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나왔다. 이를 어쩐다 머리가 하얘졌다. 공부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크게 깨달았다. 정석대로 차분히 공부했어야 되었는데 세 달 앞두고 시작한 공부는 지름길을 원했다. 하나를 쓰고, 하나는 엉뚱한 영역을 아는 대로 썼다.
면접까지 보면 한참 걸리겠다 했는데 예상외로 일 등으로 들어갔다. 첫 타자라 교수님들도 우왕좌왕하셨다며 사과하셨지만 나로서는 일찍 끝나서 홀가분했다. 면접도 허탈하긴 마찬가지. 처음부터 질문이 하나라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더 답변했을 텐데. 함께 들어간 수험생과 아쉬움을 토로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잡한 심정에 목적지를 서점으로 변경했다.
‘한쪽가게‘는 읽는 사람을 위한 조용한 공간을 지향한다. 애정하는 공간이 예약제로 바뀌고 처음 방문한 건데 마침 토요일은 예약 없이도 갈 수 있다. 반가운 서점지기님께 그리움을 담아 인사했다.
“저 오늘 시험 보고 바로 여기로 달려왔어요. “
“안 그래도 여둘톡 댓글 소개에서 들었어요, 도전하는 모습 멋있어요.”
에고~ 그 시험을 오늘 말아먹고 왔는데……. 얼굴이 빨개진다. 가방엔 대학교재와 공책밖에 없어서 책 한 권을 골랐다. 오늘은 심각한 내용도 싫고 에세이도 안 들어올 것 같아 신중했다. 아, 이거다. 윤혜은 작가님의 첫 소설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 학생들 나오고 음악이 담긴, 너무 무겁지 않을 것 같고 왠지 산뜻할 것만 같은! 혜은 작가님 글은 언제나 나와 잘 맞으니까.
디카페인 커피와 갓 구워진 붕어빵을 먹으며 책을 읽었다. (으헝~ 이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많이 풀렸다. 올해 처음 먹는 붕어빵과 시간이 늦었으니 디카페인은 어떠냐고 권하는 나긋나긋한 서점지기님!) 소설 속 나래와 이나의 우정에 빠져들다가 동공이 흔들리며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나래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냥 한번 해 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아, 나 방금 그걸 하고 온 거구나.
시험 보고 나서 이렇게 한쪽가게로 온 데에는 안전한 공간으로 숨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비가 많이 오건 말건 차를 몰아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의 부족함과 오만함이 부끄러웠다. 혜은 작가님 소설로 또 한 번 숨었다가 나를 다른 쪽에서 바라보았다. 나래의 말 덕분이다. 그래, 내가 한번 해본 거지. 기꺼이 도전해 본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는 울고 싶은 내가 있었다. 시험지를 받아보고 복잡했던 마음에는 괜히 시험을 본다고 했나, 사람들한테 응원을 많이 받았는데 이렇게 망해서 어쩌나,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등 부정적인 생각이 많았다. 그렇지만 뭐 어떤가. 그냥 한번 해 본 건데! 하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지만, 했더니 새롭게 도전했던 내 마음과 소중한 이들에게 받은 격려가 이렇게 내게 남지 않았나.
시험에 관해 혼자 꺼내든 타로카드에서는 결과 카드에 자꾸만 컵이 나왔다. 웬 컵이람. 타로 카드에서 컵은 관계를 의미한다. 결국 시험은 내게 다정한 사람들을 다시 알게 했다. 내 자리에 두고 간 귀여운 카드와 쿠키, 시험 전날 밤 도착한 커피 기프티콘들, 시험날 아침을 깨우는 다정한 메시지, 시험 끝나고 온 친구의 카톡. 이들은 어떻게 날짜를 알고 이렇게 나를 다독이는가. 시험 마치고 고단했을 텐데 들러주어 고맙다는 한쪽가게 서점지기님. 이 마음들 덕분에 시험 끝나고 나의 다짐은 공부에 대한 각오가 아니라 더 다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된다.
오늘 아침엔 혜은 작가님을 태그한 스토리 덕에 디엠을 보냈다가 편지 같은 답장을 받았다.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의 시작에 대해 덧붙여 주셨거든. 이 소설을, 사는 용기가 바닥나 있을 때 쓰기 시작했다가, 이야기를 끝맺으며 차츰 채워나가셨다는! 아아, 그렇다면 내가 어제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운명이었을까? 책을 읽어나가며 내 안의 용기를 다시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에너지는 따스한 편지가 되어 여기저기에 전해지기를.
@ 윤혜은,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 주니어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