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비극,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맥주를 한 캔 땄다. 퇴근하면 또 중학생을 마주하는 요새, 학교에서 생활지도를 힘껏 하고 집에 오면 괜히 우리 집 중학생을 단속하는 마음이 된다. 인사를 소리 내서 하라든가, 핸드폰 내려놓고 먹으라든가 잔소리를 하는 것. 직업병인가. 학원 가기 전에 먹으라고 먹거리를 꺼내 놓고, 한 주가 끝난 금요일이니까, 오늘은 이런저런 상담이 있었으니까 하고 맥주를 들이켜는데 주수희 주 선생님이 빌린 책을 갖다 주러 오겠단다. 아들은 학원엘 가고, 주 선생님을 마주했다. 십 분 간의 짧은 대화를 나눴으나 유쾌하게 웃었고, 서로의 힘듦에 공감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나아서 힘을 내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집안일의 친구는 팟캐스트. ‘김해리의 필름 클럽’ <룸 넥스트 도어> 편을 듣다가 꼭 보러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를 영화화한 것으로 몇 년 전 읽은 소설에 대한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하루에 딱 한 번 하는 영화가 마침 일요일 아침에 있어서 얼른 예매했다.
암 환자로서 죽음을 앞둔 마사는 오랜만에 조우한 친구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옆방에서 함께해 주기를 부탁한다. 잉그리드는 파리에서 지내다가 뉴욕으로 돌아온 작가로 최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썼던 터.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마사가 처음 부탁한 상대도 아니다. 그렇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둘은 한 달 동안 빌린 집에서 생활하고, 마사가 실행하기로 한 일을 함께하기로 한다.
내게는 먼 이야기 같았는데 영화를 보다가 배우고 싶은 삶의 방식을 만났다. 잉그리드는, 마사의 애인이었다가 잉그리드의 애인이기도 했던 데이미언에게 마사가 죽으려고 한다는 얘길 털어놓는다. 기후 위기에 대한 책을 쓴 데이미언은 둘이 지내는 근방에 강연을 하러 왔다가 잉그리드를 만나는데, 그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현재 지구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얘기하는 데이미언은 더 이상 인간이 옳은 행동을 할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며 셋째를 가진 아들 내외를 책망한다. 잉그리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나 또한 비극 속에 있지만 늘 우울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한다. 마사와 대화하고 그가 느끼는 기쁨과 감사를 함께 느끼고 누리고자 한다고 말이다. 데이미언은 당신은 흔치 않은 사람이라며 경탄한다. 비극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거다. 영화 속 이 대화가 내 삶을 비극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올리게 했다.
나의 근래를 돌아보면 한숨과 불만과 짜증으로 울화가 가득 차 있었다. 올해 맡은 학년은 작년부터 유명하던 아이들인 데다가 2학기가 한참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생활지도로 교사들을 분주하게 한다. 그것도 같은 학생들이 비슷비슷한 사건들로 교무실에 자주(너무 자주) 온다. 공동생활 규범이라든가 도덕적인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지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칠 대로 지쳤다. PD수첩을 보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학부모 민원 또한 교사의 사기를 꺾곤 했다.
남편이 ’ 오늘은 별일 없었어?‘ 물으면 나는 늘 할 얘기가 많다. 급기야 이번주엔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기대를 하지 말고 세 번 정도 말해서 더 안 들으면 그만해. ”
“어떻게 그래? 일 년 동안 만날 애들인데.”
왜 기대를 하느냐, 사람이 변하는 건 어렵다 - 남편이 하는 말에 나는 속으로 말한다. 일반인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어쨌거나 너무 마음 쓰지 마.”
나를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그게 마음 대로 되느냔 말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은 걸. ‘다정도 병인 양 하여’ 하는 이 시조는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내 다정은 병인가. 나는 어쩌자고 사고 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들까. 얘가 도대체 왜 이렇까 생각하려 들고. 저 엄마의 이 말은 무슨 의도로 한 말일까, 왜 그러셨을까 생각한다. 그분들이 한 말은 왜 자꾸 생각나는 건지. 생각날 때마다 여기저기를 들쑤시듯 상처가 남는다. 내 딴에는 한다고 하는데 돌아오는 감사 인사 따위 없다. 이러다가 병 걸리겠다 생각하던 요즈음, 영화에서 ‘비극’이라는 단어를 보자 대한민국에서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도 비극이 아닌가 싶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면 모든 인물들은 비극 속에 있다.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전쟁 중에 내가 취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면서 긴장된 채로 살아가는 일을 죽 해오다가, 이제는 내 통제를 벗어난 신체를 데리고 비극을 살고 있다. 잉그리드는 함께 사는 친구가 언제 죽기를 결심하는지 모르는 채 지켜보아야 하고, 나중엔 수습해야 한다. 데이미언이 말하는 비극은 인류 전체가 직면하고 있다. 최악의 탄소 배출로 우리 모두에게 곧 지옥이 펼쳐질 거라는 비극. 데이미언은 인류에 환멸을 느끼며 강연 끝에 질문도 받지 않는다. 마사는 잘 죽고 싶다며 존엄을 지키는 죽음으로 이 비극을 완성해내고자 한다. 잉그리드는 지구의 종말이든 마사의 죽음이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준비하고 주변을 살핀다.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좋았지만 잉그리드 역을 맡은 줄리앤 무어의 섬세함에 감탄했다. 그러면서 잉그리드처럼 내 비극을 살아내고 싶어졌다. 비극의 가운데에 있지만 그 안에서 기쁨과 감사를 느끼면서 사는 방식이라니. 내 삶의 나날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그 안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감사하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옆에 꼭 동료들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가족이 주는 지지하고는 또 다른 위로를 그들은 내어주니까. 그것도 서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우리 교무실 선생님들을 생각한다. 여기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저기서 혼내고 여기서 보듬고 저기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운데 학생이건 학부모건 그 어디에서도 감사 인사는 들리지 않는다. 휴 하고 내뱉는 한숨의 의미는 동료만이 안다. 우리들 사이에는 끈끈한 무언가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아무도 교사들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지만, 모두가 다 각자의 몫대로 힘들고 바쁘다는 걸, 마음 쓴다는 걸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교사가 아닌 사람들(예를 들면 남편)이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선생님들만의 마음이 있다. 학생들을 지도하고 또 반복하다가 지쳐도 아이들에 대한 마음 안에는 아이에 대한 짠함과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데. 학생들에 대한 정이 없다면 지도에 그렇게 마음을 쓸 리 없지 않은가. 마음이 마음 대로 쓰이고 전해지는 선생님들의 마음. 그래서 그렇지 뭐. 동료들 또한 짠하고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게 말이다. 학생들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다가도 또 보람 있는 순간들을 나누며 환하게 웃는, 내 마음 같은 동료들이 내 곁에 있다. 그들이 건네는 한 마디가 고맙고, 나 또한 그들에게 온기를 전할 수 있다는 걸 잊지 않고 살고 싶다.
마사와 잉그리드 두 사람의 한 달을 지켜보면서 사랑보다도 더 친밀하고 깊은 우정에 감탄했다. 두 사람이 함께 글 쓰던 사이라는 것, 소통이 잘 되는 대화상대라는 점이 서로를 이해하게 하고 둘을 연결시켰겠지. 그것 말고도 잘 듣고 공감하는 잉그리드의 태도 또한 둘의 거리를 가까이하는 데에 큰 몫 했을 거다. 나는 잘 듣는 사람으로 있어야지. 영화의 원작 제목처럼 ‘어떻게 지내요?’ 안부 물을 수 있는 친구로 내 동료들 곁에 서있고 싶다. 우리는 룸 넥스트 도어가 아니라 같은 방 안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비극 안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