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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Jun 16. 2020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싼다.

3년 차 회사원의 도시락 일지

"점심에 도시락 싸가지고 다녀도 되나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면접날. 더 질문할 사항이 있느냐는 소장님 말에 나는 저렇게 대답했다. 정말 철없는 생각 일순 있겠으나 만약 "점심은 같이 먹어야죠"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면 입사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제법 있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면접 다음날 출근을 했다.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었던 전 직장과 달리 지금의 회사는 칼퇴가 가능했고 퇴근 후엔 도시락을 싸고 하루를 마무리 하기 시작했다.


이직 전 다녔던 공간 디자인 회사는 야근과 철야가 밥 먹듯 흔했다. 저녁 10시쯤 (심지어 새벽에도...) 퇴근하고 집에 가면 도시락이 웬 말이냐! 일체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두 달 흘려보내자 그저 집과 회사를 반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건강하지 않았고 우울했다. 팀원들과 점심시간에 밥을 같이 먹는 것조차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나가지 않고 야근할 때 먹으려고 남겨두었던 서브웨이 샌드위치나 빵 등을 먹으며 책을 보거나 날이 좋은 날은 산책을 했다. 업무나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그 한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고 순간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틈틈이 일주일에 두 번이라도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고, 이직하고 나선 매일 도시락을 싸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직장을 옮긴 뒤 매일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나만의 점심시간을 즐기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 도시락은 요리의 즐거움도 안겨줬다. 요리하기 위해 장을 보는 것부터 재료를 손질하여 보관한 야채들을 꺼내 서로 조합하여 하나의 요리를 만들어 내는 행위 전부가 재미있고 흥미롭다. 요리를 도시락통에 담아 내일이 되길 기다리고 다음날이면 점심시간이 되길 기다린다. 그리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의 그 설렘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맛으로 먹는 즐거움.


개인의 취향은 개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몇 가지만 나열해보자면)

나는 갖은 야채들이 듬뿍 들어가 있고 청양고추를 넣은 끝이 맛있게 매운 요리를 좋아한다. 시장에서 7개에 만원 주고 산 아보카도는 어느 요리에나 잘 어울리고 직접 담근 올리브 레몬 절임은 모든 요리를 완성시키는데 일조한다. 좋아하며 건강한 재료로 만든 요리는 의심할 여지없는 딱 내 취향이다. 이것이 흥미를 잃지 않고 만 2년 넘게 꾸준히 도시락을 싼 이유다.


닭가슴살, 레몬 올리브 절임, 단호박,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

사람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지 않을까. 나는 도시락을 만들며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았는지. 업무를 하며 부족했던 부분은 없었는지. 가족과 지인들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었는지. 손은 분주히 움직이지만 머릿속은 차분히 생각을 하나씩 정리한다.


그렇게 오늘도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보통날 같은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 도시락은 파프리카와 새우, 양배추와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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