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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n 01. 2023

행복한 5월의 마지막날

종합소득세 신고 마지막 날인 5월 31일, 나는 컴퓨터를 붙잡고 몇 시간째 씨름 중이었다. 세금신고를 하라는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회사에 다닐 때는 회사가 알아서 해 줬었고, 백수시절엔 소득이 없으니 안 해도 됐었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니 나보고 하라는데 뭘 알아야 하든가 말든가 하지. 한약방의 실장님께 계속 여쭤보기도 미안해서 나 혼자 연신 머리를 쥐어뜯다가 마감시간을 겨우 1시간 남겨둔 시점에 깨달았다. 나를 살릴 곳은 세무서다. 동생말에 따르면 거기 가면 직원들이 다 알아서 해준단다. 퇴근길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인파와 시위대의 엄청난 소음과 곳곳의 경찰을 요리조리 피해 나는 눈썹을 휘날리며 세무서로 달려갔다.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세금신고 마지막 날에 마지막 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세무서는 한산했다. 번호표를 뽑자마자 직원이 배정되었고 나는 전문가들 앞에 앉아 아는 거 하나 없이 눈만 꿈뻑꿈뻑 댔다. 그들은 신처럼 일했다. 나의 일이었지만 나의 도움 따윈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전산에 올라오지도 않은 자료를 수기로 입력해 가며 나의 세금신고를 자기들 것인양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본인의 소득이 근로소득인지, 사업소득인지 구분도 못하는 민원인의 무식한 질문에 친절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대답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신이 맞았다.

덕분에 나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서 마치 남의 일처럼 나의 세금신고를 구경할 수 있었다. 진작 올걸. 뜯겨 나가도 되지 않았을 내 머리칼 몇 가닥을 추모했다. 비록 몇 푼 되지 않았지만 나의 세금이 이처럼 훌륭한 공무원들의 월급으로 쓰인다는 건  영광이었다.


세금신고도 순조롭겠다, 게다가 환급까지 받을 수 있다니 기쁜 마음이 넘실넘실 춤을 췄다. 세상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삐대던 때, 핸드폰에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문장이 주절주절 길었다.

"귀하께서 신청한 <2023년 우수출판 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응모작이 최종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메일을 확인하시고..."

'응? 뭐라는 거야? 우수 콘텐츠? 최종 선정?'

스팸이겠거니 대충 흘겨 본 메시지 내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다시 읽어보니 그러니까 내가 어딘가에 응모를 했고 그게 당선되었다는 내용 같았다. 대체 내가 뭘 응모했었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얼른 이메일을 열었다. 거기에 소개된 당선작 리스트를 죽 훑어보니 <자전거를 타지 않는 우즈베크 여성들>이란 익숙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내 이름 글자가 땡땡 처리되어 있었다.


와우! 대박! 그러니까 내가 응모한 작품이 당선이 되었고 그래서 '출판진흥원'에서 출판비용과 당선상금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였다. 얼떨떨했다.

나는 세금 환급을 위해 은행 계좌까지 마지막으로 제출하고야 뛸 듯한 마음으로 세무서를 빠져나왔다. 맑고 화창한 날씨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여름이었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얼굴에 함박웃음을 띤 채 길을 나섰다. 복작복작한 인사동을 지나, 퇴근인파에 묻힌 광화문을 통과해, 백합이 만개한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먹거리 가득한 통인시장에 들러 잔치국수를 곱빼기로 시켜 완그릇 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 물고서 다시 길을 나섰다. 너무 기쁜 마음에 하루 종일 쏘다니고 싶었다. 하나도 피곤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2017년이었다. 그때는 글이 뭔지도 모르고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가 잊힐까 어쩔까 풀어내기 급급했었다. 이후 글을 들여다보며 시간 날 때마다 계속 다듬었다. 써 놓은 글을 이리저리 엮어 출판 지원 사업에 종종 응모도 했었다.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나는 재밌는 거 같은데 남들에게는 별로인 모양이었다. 한 번은 친구에게 보여줬더니 소감이란 게 글이 너무 길단다. 역시 별로인가 보다 생각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써 놓은 글을 쳐다보는 것도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저게 다 마음의 짐덩이었다. 나처럼 초보 글쟁이와 책은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2월만 해도 동생이 응모하자고 해서 억지로, 꾸역꾸역 서류를 만들어 제출한 게 우즈베크 이야기였다. 당선은커녕 이후 기억조차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아휴 얼마나 재밌길래 당선까지 호홋'

흥분된 마음으로 다시 응모작을 펼쳤더니 웬걸 손발이 오그라든다. 당선작 수준이라 하기엔 정리 안 된 문장과 쓸데없는 서술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비로소 출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좋았던 당선의 기쁨은 채 한 시간을 가지 못했다. 괜히 다시 봤다.

비록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기에 부족함이 크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그만두지 않게 해 주어 감사하다.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때, 역시 안 되는구나 포기한 때, 내 뒷덜미를 부여잡고 일으켜 세워준 출판진흥원 관계자와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올리는 바이다.

재주가 부족하고 표현이 서툴고 철학도 빈약하지만 그래도 글쓰기는 계속될 거다. 하고 싶은 걸 계속 해 나갈 수 있게끔 큰 용기와 인정을 얻은 참으로 행복한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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