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앞을 지나는데 1인 시위중인 여성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 전에도 봤었던 것 같았다. '나는 폭력교사가 아닙니다'라는 사연을 들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얼핏 읽어보니 학생을 훈계한다는 것이 폭력으로 과장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내 학창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폭력이 심심찮게 난무하던 시절을 보냈던지라 세상이 참 달라졌구나 싶었다. 시간을 따져보니 고등학교 졸업한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간다.
폭력교사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폭력 교사' 무시무시한 말인데, 지난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학교에는 또 그런 교사들이 한 둘 정도는 꼭 있었다. 나에겐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좀처럼 외우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이 수학선생님의 얼굴과 이름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의 성은 조씨였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도내 명문여고로 손꼽히는 공립여고로 유학을 떠났다. 인근 지역에서 나름 공부로 좀 한다는 애들이 죄 모인 학교라 그런지 학생은 대개 공부에 전념하자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촌에 사는 내 중학교 동창들의 행실이 속된 말로 더 까졌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내가 1학년 신입생이던 시절 2학년 선배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시골 남자중학교에서 근무하다 전근 왔다고 하는 바로 그 조 선생님이었다. 수학 선생님 생일날엔 선배들이 단체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에 축하 사연을 보내 소개도기도 하는 등 이래저래 학교에서 떠들썩하리만치 인기 선생님이었다. 내가 2학년이 되자 조 선생님이 우리 반 수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3학년 졸업반으로 올라간 선배들은 "선생님 안 돼요, 보고 싶어요. 계속 가르쳐 주세요" 난리를 피웠다.
처음으로 가까이서 수학 선생님을 관찰하게 되었다. 키는 165센티미터 정도에 둥글둥글 퉁퉁한 몸통을 가졌으며 얼굴은 크고 대추처럼 검붉었으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외모만 봐서는 대체 왜 선배들에게 인기폭발이었는지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수학선생님은 누가 봐도 보기 민망하고 괴상한 버릇을 두 가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수업 때마다 팔뚝만 한 길이에 검지 손가락 굵기의 막대기를 지참했다. 수학 문제 풀이를 하면서 칠판을 탁탁 치기도 하고, 문제 풀이할 학생을 지목하는 용도로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하나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숙이고서 수학 문제라도 풀라치면 선생님은 슬며시 탁자 뒤로 가서 그 막대기를 이용해 자신의 항문 주변을 긁어대는 게 아닌가. 교실 좌측과 우측에 앉은 학생들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 뜨악한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두 번째 버릇은 더 민망했다. 착용한 아래속옷이 꽉 끼는지 어떤지 자꾸만 수시로 하체를 이리저리 비비듯 비틀어 댔다. 그러다가 다리를 O자로 벌린 후 바지 안의 속옷을 잡아떼는 듯한 행동을 했다. 마지막으로 냄새가 궁금한지 어떤지 그 손을 자신의 코 앞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세상이 아직 긍정적이었던 우리 여고생들은 그 손을 우리 코에 안 갖다 댄 게 어디냐며 선생님이 치질에라도 걸린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곤 이 괴상한 버릇에 대해 보아도 못 본척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외모와 버릇이 저렇게 괴상망측함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었다면 그걸 상쇄할 엄청난 내면의 아름다움이 있는 분이겠거니 했었다.
너 나가
수학 선생님은 유머감각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끔 농담을 잘 던졌다. 가랑잎만 굴러가도 깔깔대는 소녀들인지라 우리는 그럴 때마다 와~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평소에도 친구들과 엄청나게 낄낄대며 웃음이 넘쳤다. 나와 내 짝궁은 선생님이 농담을 던질 때마다 여지없이 서로 한마디를 더 보태가며 웃음을 증폭시키곤 했었다. 그리곤 배가 찢어져라 웃어제꼈다.
하루는 우리의 큰 웃음소리가 선생님에게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아니, 나의 웃음소리가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나의 깔깔대는 웃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조 선생님은 칠판을 떠나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인상은 순식간에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
낮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변한 분위기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 앞에 멈춰 선 선생님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앞머리를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당기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나, 일어나!"
너무 급작스럽게 발생한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대체 왜 화가 난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머리채를 잡힌 상황도 모욕적이었다. 그것도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말이다. 교실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변했고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이 갑작스럽고 황당한 상황에 되려 나의 머리는 얼음물에 담근 듯 침착하고 차가워졌다. 그리고 꾹 다문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한 친구가 용기있게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났다. "커선이에게 다른 뜻이 없었을 겁니다. 그냥 웃은 거라고 생각됩니다." 고맙게도 친구는 나의 입장을 대신 항변해 주었다. 선생님은 기분이 누그러진건지 아니면 더 이상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면 안 되겠다 판단한 건지는 몰라도 더 이상 가혹하게 굴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교실 밖으로 쫓겨나야만 했다. 나는 홀로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생각했다. 도대체 내가 왜 어찌하다가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농담한 게 들렸나? 근데 그거 수업에 관계된 거였는데? 그리고 내 짝이랑 같이 얘기한 건데 왜 나만 걸렸지? 내 웃음소리가 너무 컸나? 농담은 선생님이 먼저 해 놓고선 왜 웃는다고 뭐라 하는거지? 그리고 나 말고도 다들 웃고 있었는데!'
수업 종이 울렸고 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주위로 모여든 친구들은 오늘따라 선생님이 이상하다고 수군댔다. 맥락 없이 화가 나서 학생을 쫓아내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이어 간 상황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었다. 우리는 주름 없는 뇌에 어울리는 단순한 결론이 내렸다. "오늘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았나 보네. 사모님하고 싸우기라도 했나 부지뭐." 나는 학창시절동안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머리 채를 잡히고 교실에서 쫓겨난 일이 황당하고 화가났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신 수학 시간만 되면 은근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졸았으니 귓방망이 좀 맞아야겠다
그 이후 수학 선생님은 우리에게 내면의 매력을 보여주는 대신 감춰진 폭력성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 시작했다. 시범케이스로 걸렸던 나는 머리카락이 잡혀 교실을 쫓겨나는 수준에 그쳤지만 두 번째부터는 심각해졌다. 반 친구 중에 역시나 공립학교 교사를 어머니로 둔 A가 있었다. A의 어머니는 전교조 지부 간부로 활동할 정도로 교사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 이 날은 불행하게도 A가 수학 선생님의 타깃이 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시범조로 걸린 게 나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말았다.
우리 고등학교는 말 그대로 산 정상에 위치해 있었고 지은 지 오래된 시멘트 건물이었다. 여름에는 엄청나게 더웠고 또 겨울에는 엄청나게 추웠다. 복장 단정 규정 때문에 여름엔 땀이 안 빠지는 나일론 재질의 하복으로 더위와 싸워댔고, 겨울엔 얇은 교복 재킷으로만 추위를 견뎌야 했다. 복장 단정 규정 때문에 점퍼나 코트 등의 사복은 등하교 때만 입을 수 있었다. 냉방도 난방도 형편없는 환경이었다. 더운 여름 한낮에는 달랑 선풍기에 의존해서 수업을 듣고 있으면 눈꺼풀이 절로 감겼다. 눈꺼풀이야말로 항우장사도 못 이긴다고 하잖은가?
한낮 온도가 30도를 웃도는 습하고 찌는 날씨였다. 다들 거불버불, 꿈뻑꿈뻑하며 수학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일어나!"라고 날카롭게 외치는 게 아닌가? 일순간에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봤더니 A가 졸다가 선생님한테 걸린 것이었다. 근데 나도 반쯤 의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A가 선생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책상에 아예 엎드려 잔 것도 아니었고 졸음을 못 이긴 나머지 고개를 꾸뻑꾸뻑 한 수준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그 특유의 서늘하고 삐딱한 얼굴을 한 채 막대기를 손바닥으로 탁탁 쳐대며 A에게로 다가갔다.
A는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A앞에서 걸음을 멈춘 선생님은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A의 따귀를 때리는 게 아닌가? "딱!"하는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생님은 왼손을 마저 들어 올리더니 다시 뺨 한대를 "딱"하고 올려 부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학생이 수업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고 교사가 도구를 이용하지도 않고 맨손으로 열여덟 살 다 큰 학생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연속으로 두 대나 말이다. 아마도 학창시절 동안 처음으로 체벌을 당한 게 틀림없을 모범생 A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그래 놓고도 자기 분에 못 이기는지 A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하루 이틀 졸아본 게 아닌 우리는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분이 풀린 건지 어떤 건지 이내 선생님은 교탁으로 돌아가더니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태연하게 남은 수업을 이어갔다.
ㄱ 친구의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게 되시겠지. 자신의 딸이 부당한 체벌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지 않으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학교는 잠잠했고 수학선생님은 평온해 보였다. 어머니가 속상해하실까 봐 ㄱ친구는 집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어머님이 아시고도 동료 교사로서 그냥 넘어가기로 하셨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오늘 너 좀 밟아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사이, 수학선생님의 폭력성은 점점 도를 더해 갔다. 우리 중 가장 운이 나빴던 이는 바로 나의 절친한 기숙사 친구 ㄴ이었다.
당시 기숙사는 임시 거처로 시설이라 할 것도 없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6개월 안에 완공된다고 알고 입학했던 기숙사 신축이 2년이나 걸린 탓이었다.
내가 처음 배정받은 곳은 교실에 2층 침대를 빽빽하게 들여놓은 곳이었다. 40명 이상이 단체로 잠만 자던 공간이었다. 어느 날은 한밤중에 취객이 난입하려 해 기숙사생들이 안에서 문을 잡아당기고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다. 보안이라곤 문고리를 톡 하고 눌러 잠그는 것 단 한 가지뿐이었다.
2학기가 되어서는 12명이 쓰는 방으로 배정되었다. 이 역시 자투리 공간을 개조한 것으로 비가 오면 천장이 새는 방이었다. 대야를 받쳐 놓고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12명이 옹기종기 이불을 깔고 잠을 자곤 했다.
잠보다 더한 것은 식사였다. 기숙사 생들은 학교 매점에서 월식을 하고 있었다. 우악스러움이 인상적이던 매점 아주머니가 차려내는 밥상은 2인분 같은 5인분 밥상이었다. 양도 질도 부실하고 형편없는 매점 밥을 삼시 세끼 먹으며 성장기 아이들은 항시 배를 곯았다.
그렇게 1년 넘게 동고동락하자 기숙사 친구들 사이에는 끈끈함이 생겼다. 공립학교 특유의 분위기, 누구 하나 학생을 신경 써 주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똘똘 뭉쳐 지냈다. 집 떠난 외로움과 사춘기의 방황을 함께 견디던 마음 맞는 친구들 몇몇은 자매 사이들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우리는 늘 함께였다. 매일 밤 10시, 자율학습을 마치고 삼삼오오 기숙사 열람실로 모여들었다. 함께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면 그 날의 스트레스가 날아가곤 했다. 계획대로 자퇴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친구들은 내게 보석 같은 존재들이 된 것이다.
항상 뭉쳐 다니던 무리 중 한 명이 ㄴ이었다. 넥스트의 광팬이었던 ㄴ은 우리 중 사회비판의식이 가장 뛰어났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향이었다. 평소 행실도 단정하고 차분하고 자존심도 무척 센 친구였다.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다. 간혹 그런 아이 있잖은가? 부모님이 잔소리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성숙한 아이. 바로 친구 ㄴ이 그런 아이였다.
하루는 오후 5시 무렵, 보충수업까지 다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교실 문을 나섰다. 바로 옆 반이었던 친구 ㄴ의 교실 앞을 지나갈 때였다. 아이들이 복도에 서서 교실 안을 향해 웅성웅성 대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까치발을 하고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교실엔 친구 ㄴ과 담임이었던 수학선생님 단 둘이 서 있었다.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수학 선생님이 친구를 향해 뭐라고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서늘한 얼굴, 그 얼굴이 유리 사이로도 생생히 보였다. 무슨 일인지 또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수학선생님은 친구의 따귀를 때리기 시작했다. 따귀를 맞던 친구가 바닥에 넘어졌다. 수학 선생님은 바닥에 넘어져 있는 친구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발로 밟고 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났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마치 내가 발길질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학선생님에게 머리채를 잡힌 이후로 수학 시간만 되면 나도 모르게 몸에 긴장이 들어갔었다. 책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그 기억을 잊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의 절친한 친구가 수학선생님에게 무방비로 맞고 있는 장면을 봐 버린 것이었다.
친구가 몹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모인 친구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두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밤 10시, 자율학습을 다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에서 드디어 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친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친구의 평소 성격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멀찌감치 앉아 친구를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이럴 땐 모르는 척해주는 게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 같았다.
귀한 딸을 유학 보내 놓고 친구의 부모님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심정이 어떠실까? 시골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시며 뒷바라지하시던 부모님께 공부 잘하고 야무진 둘째 딸은 큰 자랑이었다. 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귀하게 키운 딸이 오늘 학교에서 담임에게 손으로 발로 맞았다니. 그 사실을 부모님께서 아신다면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짐작대로 친구는 부모님께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후에도 수학선생님에겐 아무런 제재가 가해진 적이 없었다. 학교엔 어떤 공식적인 항의나 불만도 접수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선생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또 긴장할 뿐이었다. 우리는 어떤 인격을 지닌 선생님이라도 여전히 스승이고 또 우리보다 많이 배웠고 나이도 경험도 많고 그래서 그들을 응당 존중해야 하는 줄 알았다. 아마 학부모들이 일련의 폭력 사건들을 알았어도 문제 삼길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3학년이 되어서도 우리는 이 수학선생님을 만나야 했다. 여전히 수학선생님은 언제 어떻게 기분이 변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엉덩이와 사타구니를 긁고 만지는 버릇도 여전했다. 입시로 예민해진 고3 학생들에게 더 이상 신체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교묘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자신의 분풀이 대상으로 삼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다. 우리 반 부반장이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뭘 가지러 교무실에 불쑥 들어간 것이었다. 자율학습 감독으로 야근이 잦은 고3 담임은 전통적으로 남자 선생님 몫이었고, 당연히 학년 교무실엔 남자 선생님들 뿐이었다.
우리 반 부반장이 불쑥 학년 교무실로 들어 선 때였다. 하필 그때 남자 선생님들 몇몇이 야한 영상인지 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놀라고 부반장도 놀라고. 교실로 부리나케 달려온 부반장은 자신이 본 것을 우리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영어 선생님, 수학선생님 등등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순식간에 이 가십은 교실에서 교실로 퍼져 나갔다. 그 날 이후 소위 '야동 리스트'에 포함된 선생님들 수업시간엔 왠지 모를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런데 수학선생님은 달랐다. 그때부터 집요하게 부반장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매 수업시간마다 부반장은 칠판에 불려 나와 문제풀이를 해야 했다. 걸핏하면 인신공격성의 언사를 듣기도 했다. 노골적인 괴롭힘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학생도 성인이 된다
수학 선생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고등학교 2년을 거적때기 같은 곳에서 지내다 3학년이 되기 전 신축한 기숙사로 이사했다. 기숙사 식당 밥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치킨, 짜장면, 핫도그, 쌈밥, 딸기 셰이크 등 식사메뉴는 늘 다양했고 영양가 넘쳤으며 결정적으로 너무너무 맛있었다. 이미 성장판이 닫힌 게 억울할 정도였다. 우울했던 2년의 시간을 상쇄할 만큼 기숙사 밥은 기쁨의 원천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드디어 드디어 떠나는구나' 시원하기만 했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단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면 기숙사 밥을 더 이상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정성스레 밥을 만들어 주던 식당 아주머니들은 학창 시절을 돌이켜 가장 고마운 분들이기도 했다.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 학교를 떠나기 전 기숙사 식당엘 들렀다.
그곳에서 수학선생님을 우연히 마주친 것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졸업을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말을 이어 나의 앞날에도 건승을 빌어 주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조심스럽고 공손하기까지 한 목소리와 태도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선생님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의아하기까지 했다.
대학입시 실패로 졸업을 한들 또 다른 1년의 수험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쭈구리처럼 위축되어 있던 나에게 예상치 못한 선생님의 격려가 의외로 가슴에 와 닿았다. 하마터면 선생님이 원래 겸손하고 따뜻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될 뻔했다.
한편으론 선생님의 달라진 태도를 통해 이제 정말 졸업이구나, 비로소 성인이 되었구나를 깨달았다. 수학 수업을 듣지 않아도, 선생님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학생-스승의 관계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수학선생님과 입에 발린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등을 돌려 버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학창 시절 받은 상처를 표현하는 가장 소심한 방법이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당신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수학선생님 이야기가 나오자 친구 ㄴ이 뒤늦은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었다. 친구의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친구가 구타당하던 장면이 떠오르면 심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 그때 왜 난 보고만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을까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그 시절을 겪고 지나고 보니 그는 우리에게 스승님도 선생님도 아니었다. 밑자락도 안 깔고 혼자 화가 잔뜩 나, 학생들에게 분풀이를 해댄 분노조절 장애자였다. 혹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실력이나 버릇이 우스워 보일까 봐 혼자 오버한 열등감 덩어리였다.
그렇게 길에서 우연히 본 '폭력교사'라는 말은 내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그에 꼭 맞는 선생님 한 분을 생각해냈다. 당시엔 학생에 대한 구타와 모욕이 빈번해 폭력교사라는 단어도 딱히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부당하게 당한다 싶어도, 선생님의 개인적 분풀이가 의심되어도 그저 운이 나쁘거니 했었다.
그들이 그래선 안 되었지만 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우린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온 연둣빛의 새싹들 같았다. 비바람이든 햇빛이든 되는 대로 견디며 성장해야 하는 존재들 말이다.
요즘은 학교에서 체벌이 엄격히 금지되었다더니 폭력교사란 말이 주홍 글씨처럼 여겨지는 모양이다. 삼복더위 땡볕에 일인시위를 해서라도 폭력교사라는 오명을 벗으려는 분도 보이니 말이다.
간혹 미디어에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사를 모욕하고 구타하는 사건들이 심심찮게 등장해 세상이 말세란 소리도 들린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상도 변해감을 절실히 느낀다. 시절이 변했다.
그때 그 우리의 수학선생님은 이렇게 변한 시절을 어떻게 살고 계실까, 아직 교단에 계실까 아니면 퇴직하셨을까. 시간이 흐르고 선생님에게 교단 시절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당신은 우리 개개인을 까맣게 잊었겠지만, 어떤 이들은 여태 학창 시절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교사와 관련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유교란 전통 때문에 교사에 너무 많은 의미와 기대를 부여한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어디에서든 배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여덟 살 꼬맹이도 학생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꼭 나이가 많아야만 존중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수학선생님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다. 교사 대 학생이라는 관계 이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우리 학생들은 한 번 바라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