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시생 일기 1편
2016년은 참 의미가 큰 해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엄청난 지진을 겪었고(비유 아님), 인생의 의미를 깊이 고민해본 때였다.
대학교 3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 휴학을 했다. 학교 생활에 너무 지쳤고 인간 관계에 질렸다. 늘 과외가 2개씩은 잡혀 있었고 틈틈이 단기 알바를 했다. 대외활동과 과제에 치여 제대로 밥을 못 먹을 때도 허다했다. 고작 22살, 만으로 20살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싶지만 그때는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그 때 “안정적으로 살고 싶으면 공무원 시험을 치라”는 말이 들렸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 1위다. 최소한 공무원이 어떤 직업인지 좀더 알아보고 덤볐어야 했는데 성급했다. 그렇다고 좀더 알아봤다면 공무원 시험을 안 쳤을 거냐고 물어본다면… 아니, 어떻게든 쳤을 거다. 좋은 점만 보려고 하면서.
후회하는 포인트는 그보다 앞에 있다. 대학 생활을 목적없이 바쁘게만 보냈다. 의미없는 시간들은 아니었지만 체력과 시간을 분배하지 않고 쓴 탓에 에너지가 소진돼서 정작 중요한 결정을 내릴 힘이 남질 않았다. 내가 밤을 새더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하지 못했고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얼굴인지 바라볼 여유가 바닥났다. 그런 상태가 되도록 냅둔 게 가장 후회된다.
가을학기 시작 전 친구들이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갈 준비를 할 때 나는 공무원 기본서를 샀다. 카카오톡을 치우고 인스타그램을 없앴다. 공단기 프리패스를 끊었다. 합격을 하면 환급을 해준단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모아놓은 돈으로 결제했다. 지금 프리패스 금액에 비하면 저렴하지만 당시 나한테는 큰 금액이라 꼭 환급받아야겠다는 결의에 찼다. 유일하게 생산적이고 의지적으로 해낸 생각이었다. 그때의 나는 도망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무얼 해도 죄다 내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든 휴학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 아니, 휴학한 동안 뭘 했는지 사람들에게 설명할 거리가 필요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일반행정 9급 시험을 보기로 했다. 7급은 과목이 너무 많고 다른 직렬은 시험이 한 번 뿐이었다. 내가 시험칠 때만 해도 서울시와 지방직 시험의 날짜라 달라서 일반행정 9급은 한 해에 기회가 두 번이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휴학을 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선재 국어, 손진숙 영어, 전한길 한국사, 위종욱 사회, 김중규 행정학을 듣기로 했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면 당최 써먹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과목들이지만 어쩌겠나, 이미 수험생이 되기로 한걸.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하루 루틴을 돌렸다. 집 근처 독서실을 다니며 인강을 들었다. 순공부시간은 10시간이 되어야 한다길래 최대한 그에 맞추려고 노력했고 밥을 먹으면서도 영단어를 외웠다. 허리가 너무 아파 근처 헬스장에 가서 매일 30분 러닝머신을 탔는데 그 동안에도 한국사 인강을 들었다. 전한길 선생님이 영상 속에서 “언니! 그러면 14급 공무원밖에 못해!”라고 찢어질듯 소리치시면 정신이 번쩍 들고 땀이 더 주룩주룩 흘렀다.
초반에는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없을까, 떨어지면 뭘 해야 하나 고민에 파묻힐 것처럼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틴에 익숙해졌다. 차차 고민의 가지 수가 줄었다. ‘오늘 계획한 분량 다 끝낼 수 있을까’ 정도가 다였다. 조바심은 났지만 하루 일과가 단순해지니까 평화로운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에 이렇게 집중해본 적이 언제였나 새삼스러우면서 차분해지기도 하고…
카톡과 인스타그램을 지우면서 인간관계도 정리했다. ‘인간관계 디톡스’라는 말이 있던데 그 말이 참 적절하다. 꼭 필요한 사람들만 남았다. 인맥을 넓히려고 참 애쓰는 동안 스스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웬걸,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늘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에너지가 소진되어 있어서 그 상태가 디폴트라고 착각했던 거다. 사색에 잠기거나 고고하게 산책을 하는 시간은 가질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과 말하지 않고 매일 하루 하루를 나로 채우다보니 멈추고 머물러 있을 때 비로소 충전되는 기분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외롭고 단조롭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일상이었다. 이정도면 휴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고, 그동안 스스로에게 너무 소홀했었다며 감상에 젖고 루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대박 사건이 터졌다. 한반도에서 유례없이 큰 지진이 일어난 거다.(2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