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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옳은 Jul 31. 2022

저 같아도 제가 수상할 것 같습니다

그늘막을 접다가 런닝맨을 찍은 것 같다

"주민센터에서 이런 일도 해요?" 


최근 들어 부쩍 이 말을 많이 들었다. 민원인에게도 듣고 신규 직원 분께도 들었다. 무슨 주민센터에서 민방위 대피시설 점검을 나오냐, 무슨 주민센터에서 주차장 시설을 확인하러 나오냐는 민원인의 질문이었고 주민센터 직원이 집앞 청소도 해줘야 하고 건물에 샌 물도 퍼야 하는 줄 몰랐다는 건 신규 직원의 말이다. 


이 질문에는 내가 해줄 말이 참 없다. "그러게요. 저도 그런 줄 지금 알았어요." 정도 뿐이다. 이제 겨우 주민센터에서 근무한 지 7개월 차로 첫 번째 여름을 보내고 있다. 모기 유충제도 나눠주고 식물이 죽은 곳이 있으면 예쁘게 새로 심어주기도 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낸 세 계절(겨울, 봄, 여름) 중에 여름이 제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주민센터에서 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 중 하나는 그늘막 접기다. 모두 중앙통제센터 같은 곳에서 알아서 열고 닫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우리 동은 수동식 그늘막이 몇 개 있어서 비가 오거나 날이 더우면 열고 접으러 직접 장비를 챙겨 돌아다녀야 한다. 그늘막은 생각보다 크다. 성인 여자가 혼자 접기에 살짝 버거울 정도로 둘레가 꽤 커서 조금 허둥대게 된다. 처음에는 길 한 가운데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늘막과 씨름 하는 게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얼마 전에 '그러려니'를 참 잘 하게 됐다는 걸 느낄 일이 있었다. 그늘막 하나가 고장이 나서 접으러 갔는데 같이 간 주임님과 나 둘 다 휴대폰을 안 들고 가버렸다. 고장이 난 부분과 접어둔 상태를 찍어서 결재를 올려야 해서 사진이 필수였다. 사무실은 멀고 날은 푹푹 찌듯이 더웠다. 차마 사무실에 다녀올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주민센터 직원이거든요. 혹시 저기 고장난 부분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휴대폰을 안 들고 왔어요..."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 여성 분께 도움을 요청했다. 종교 단체에서 나온 사람 같아 보일까봐 최대한 수상해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을 걸었는데 멈칫 하시더니 다행히 흔쾌하게 도와주셨다. 그 분을 무사히 보내드리고 그늘막을 접었다. 자, 이제 접은 상태만 찍으면 된다. 지나가는 분 중에 제일 착하게 생긴 분을 잡았다. 저기, 죄송한데로 시작하는 수상한 멘트를 한 번 더 날렸다. 못 들은 채 지나가려고 하시다가 '주민센터 직원'이라는 단어에 멈춰서 주셨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수상해보이는 접근이었는데 착하신 주민 분께서는 사진을 몇 장이나 찍어 보내주셨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걸 느꼈다.


이제 주민센터에서 그늘막을 접고 연다는 것을 아는 분이 두 분이 더 생기게 됐다. 아마 어딘가에 가서 "오늘 길 가는데 동사무소 공무원이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함 ㅋㅋㅋ" 이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푸셨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길 잃은 더운 공무원에게 사진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평범한 그늘막 담당 공무원이 별안간 소소하게 런닝맨을 찍은 기분이 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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