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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닉샘 Nick Sam Mar 31. 2020

참여디자인을 디자인하는 원칙

배움의 공간 메이킹노트 #5 공간 디자인 DIY 워크샵을 준비하며

아쉽게도 와플학당 준비의 시계는 멈춰 섰다.


  지난해 12월 공간을 계약한 후 2개월 동안은 공간에서 일어날 배움을 구상하고, 공간의 이름을 짓고, 공간에서 진행될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았다. 와플학당에서 만들어갈 새로운 배움의 형태를 지역 주민분들께 소개하는 간단한 홍보 행사도 진행했다.


그렇게 지역에서 새로운 배움의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느끼고 이제 인테리어 디자인과 공사를 준비하려던 찰나... 2020년 2월 22일, 코로나19 감염병 재난 위기경보가 '심각'단계로 격상되었다. 주민들에게 와플학당을 소개하는 행사 바로 다음날이다. 곧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를 위해 전국적인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하게 되었고 학교들의 개학이 연기되었다. 현재 '심각'단계 격상 이후 5주가 지났지만, 학교 개학은 한번 더 미뤄졌고 아직은 상황은 좋아지고 있지 않다.


  교육부의 첫 개학 연기가 발표될 즈음에 나는 마을건축가 선생님과 함께 공간 디자인 워크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인테리어 공사를 위한 첫 단추로 준비하는 것은 공간 '디자인'이 아닌 공간 '디자인 워크샵'이었다. 공간을 사용할 청소년과 청년이 직접 공간 디자인에 참여하는 공간 디자인 DIY 워크샵이다. 하지만 와플학당의 시계는 속상하게도 공간 디자인 워크샵 준비 단계에서 멈춰버렸다.

비영리단체 ‘유쓰망고’의 김하늬 대표님께서 ‘와플학당’을 소개해주셨던 주민 포럼 행사의 사진. 이후 와플학당의 시계는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다.


"청소년과 청년이 함께하는 참여디자인으로 설계했으면 합니다."


  마을건축가께 처음 와플학당의 디자인을 부탁드리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참여디자인'은 말 그대로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이 직접 의견을 제시하며 디자인에 참여하는 것으로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용어로도 알려져 있다. 이는 공간을 준비하는 이에게도 설계하시는 건축가에게도 번거로운 작업이다. 다양하게 펼쳐질 사람들의 의견들을 종합하고 수용하는 단계가 필요하기에 시간도 노력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마을건축가께서는 선뜻 "해보자"라고 답해주셨다. 그렇게 시작된 공간 디자인 DIY 워크샵의 준비는 기획서를 작성하고 마을건축가께 보여드려 피드백받고 수정하고 다시 보여드리고 하는 작업을 몇 차례 거듭하며 진행했다. 차차 기획서가 상세하게 다듬어졌고 포스터터도 제작에 들어갔다.


마을건축가께서 몇 번의 회의에 걸쳐 공간디자인 워크샵 기획 내용을 꼼꼼하게 점검해 주셨다. 공주 원도심 마을 카페에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의 부담은 점점 커져갔다. 코로나19로 워크샵의 진행 일정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포스터가 완성되었을 때는 이미 두 번째 개학 연기가 발표되었고 예정된 일정으로 워크샵 진행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참여디자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배움의 공간으로서 와플학당을 반드시 참여디자인으로 완성하고 싶은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내가(어른이) 꿈꾸는 배움이 아니라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이 바라는 배움'을 실현하는 공간이고 싶다. 와플학당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 환경을 한두 명 어른의 상상으로 구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공간을 사용할 청소년과 청년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어떤 환경을 바라는지 직접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이 공간의 기획부터 참여해 스스로를 공간의 진짜 주인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와플학당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편하게 여기고 마음껏 머물고 사용하는 공간이고 싶다. 그런 공간에서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목소리를 내고 자유로운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간을 기획하는 단계부터 청소년과 청년들이 제대로 참여한다면 그들의 마음속에 이미 공간은 그들의 것일 수밖에 없다.

  

  셋째, 공간 디자인이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이 서로를 발견하고 연결되는 커뮤니티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와플학당에서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학교와 나이, 성별을 넘어 같은 관심사로 연결되고 만나며 소통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공간 디자인 워크샵에서 건축 설계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모이는 것을 넘어, 좋아하는 것,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그 자체로 커뮤니티의 경험이자 시작점을 만들어주고 싶다.


  이러한 취지와 생각을 워크샵의 과정에 충분히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마을건축가께서도 워크샵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더욱 좋은 워크샵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중요한 조언들(아래 붉은색 글씨)을 해주셨다. 그리고 마을의 홍보기획사의 도움을 통해 워크샵의 내용이 담긴 전단지와 포스터가 완성되었다. 워크샵의 진행이 불분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열심히 준비해주셨다.  


1. 참여자에게 전달되는 용어는 최대한 쉬운 한글 단어로 사용할 것

2. 처음 만나 서먹한 상황에서 협업할 수 있는 분위기로 전환하는 데 신경 쓸 것

3. 디자인 프로토타입 제작에 사용하는 재료 선정에도 최대한 자유를 허락할 것

4. 참여자들의 참여도에 따라 진행 방식과 조구분을 섬세하고 유연하게 기획할 것

5. 참여자의 디자인 과정에 건축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것

6. 워크샵의 각 차수가 매력적일 수 있도록 적절한 소제목을 붙일 것


와플학단 공간 디자인 DIY 워크샵의 세부 계획을 담은 전단지


어쩔 수 없으니 소규모 워크샵이라도 진행을 해야 할까요? 바닥 공사라도 할까요?


  공간 워크샵의 기획이 완성되어 갈수록 답답하고 애가 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커지는 창업 계획의 차질과 비용 부담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와플학당 준비를 지원해주는 창업 지원사업의 실적과 평가 부분도 크게 걱정되었다. 거듭되는 워크샵 준비 회의에서 마을건축가와 홍보담당자께 조급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두 가지의 대안적인 아이디어를 상의했다.


  첫째는 코로나19로 인해 공개 모집이나 대규모 행사 진행은 불가능하니 주변에 초대나 추천을 통해 비공식으로 소수의 인원으로라도 진행해보자는 의견이었다. 공주시에는 확진자는 없는 상황이었다. 소규모로 진행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둘째는 최소한의 공간 사용 준비를 위해 바닥 공사라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건축가께 미리 바닥의 패턴과 색깔이라도 정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건축가께서는 구상을 위해 공간 측량 작업부터 시작해주셨다.


그러는 사이에 두 번째 개학 연기가 발표되었고 공간 디자인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디자인 구상을 위해 직접 공간 측량을 해주고 계신 마을 건축가 선생님. 원칙을 지키는 장인의 태도를 배운다.


"열씨미, 그리고 옳게 해 봅시다~"


  마을건축가께서 공간 준비에 대한 페이스북 포스팅에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셨다. 회의를 통해 통화를 통해 마을건축가와 홍보담당자께서는 조급해지고 흔들리는 마음을 잘 잡아주셨다. 두 분의 조언에 따라 내린 결론은 원칙을 지키는 것.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서 억지로 진행하는 워크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황이 어렵다고 편법처럼 진행하는 워크샵이 제대로 된 워크샵이 될까. 그럴리 없다, 원칙대로 가자는 것이다. 포스터 인쇄 전이니 일정을 미루고 홍보를 진행하며 학교 개학의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바닥 공사 또한 공간 디자인에서 비중이 큰 요소이므로 워크샵 참여하는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 참여자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참여디자인은 와플학당에서 만나는 첫 배움의 경험이므로 상황이 어렵더라도 제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공간 워크샵을 연기하고 바닥 공사를 포기하는 결정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쉽지 않았다. 참여디자인을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든 지역에서든 사회에서든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된 참여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 현실임을 잘 알고 있다.


정말 어렵더라도 제대로 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참여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소도시의 작은 마을에서 비록 작은 공간 하나를 만드는 일이지만 원칙을 지키는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2020년 3월 31일 by 닉샘


마을건축가와 함께 하는 공간디자인 DIY 워크샵 포스터
워크샵을 위해 필요한 테이블과 의자, 도구들을 준비해 놓고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된 만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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