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로 쓰일법한 공간에서 피어난 Craft Beer culture
인플루엔서(Influencer)라는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영감과 영향을 주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최근 한국에서도 유명 연예인에 버금갈 정도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소비하는 모든 것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 예로, 아저씨들의 모임 장소로 여겨지던 을지로가 최근 각광받는 새로운 명소가 되었는데, 이 역시 낡은 인쇄소 골목에 자신들의 아지트를 만들던 힙스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저녁이 되면 구석구석 간판 없는 공간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그렇다면 요즘 런던의 청년들이 즐겨 찾는 장소는 어디일까? 쇼디치, 노팅힐, 캠든 등 유명 관광지도 있겠지만
필자는 런던에 퍼져있는 Railway arches, 한국어로 말하자면 '굴다리'를 꼽고 싶다.
굴다리?
어떤 이에게는 생소하거나 또는 익숙한 이 존재(?)는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Overground, DLR 등 지상철도가 다니기 위해 고가에 철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도가 나있는 아래에는 항상 굴다리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일부는 차도를 위하여 터널을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외곽지역의 굴다리는 주로 슬레이트를 쳐 창고로 임대되어 사용되어 오고있다. 이러한 굴다리 창고를 공간이 필요한 아티스트나 소규모 사업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하겠지만 초기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이었을 것이다. 소규모 사업자들은 악명높은 런던의 건물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고, 그렇다고 런던을 벗어날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의 매력적인 사업들은 팬덤을 만들었고 더 나아가 런던의 굴다리를 숨겨진 명소로 탈바꿈 시켰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굴다리 문화'라고 지칭하고 싶다. 런던의 수많은 철길 아래, 그들의 다양성 만큼 많이 피어나는 공간과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공간, 스튜디오, 소규모 레스토랑, 편집샵, 양조장, 벼룩시장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소규모 맥주와 벌꿀주 양조장이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들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비용적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이들이 굴다리를 양조장으로 선택한 데에는 의외의 장점들이 있었다.
양쪽이 크게 뚫려있는 구조로 인해 크고 무거운 양조장비의 이동이 용이함
번화가나 주거지와 거리가 있어 소음이나 양조작업에 제약이 덜함
애초에 굴다리는 양조장에 최적인 공간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렇다보니 런던에서 이렇게 운영되는 양조장 중에는 현재 세계적으로도 인지도가 있는 brew by Numbers나 The Kernel brewery가 태어나기도 했고, 그 외에도 많은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이 철길을 따라 하나의 테마거리를 만들정도로 연결되고 있다.
물론 굴다리를 활용하는 것에 장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굴다리는 주로 런던의 명소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접근성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부 지역에서는 치안이 좋지 않은 곳도 존재한다. 번외로 이야기 하자면, 작년 멘체스터에 위치한 모 브루어리를 방문하기 위해 역에서 10분정도를 굴다리를 해쳐 걸어갔는데,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산한 분위기의 동네와 간혹 지나가며 우리를 처다보는 술과 약에 쩌든 사람들, 사이렌 소리가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그 날은 탭을 여는 날도 아니었어서 양조장 직원과 간단히 이야기만 나누었고, 돌아오는 길은 아예 다른 지역에 갈 겸해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길에 창 밖을 보니, 사람들은 여기를 어떻게 지나다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주말에 탭을 연다고 그리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런던은 외곽이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정이 좀 낫지만, 경험상 젊은 사람들의 명소라고 해서 가본 곳은 대부분 아름다운 주변경관은 아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할렘의 경계같은 곳이라고 할까)
또 다른 단점으로는 소음과 진동이 있다. 굴다리 특성상 주기적으로 기차가 위를 지나다니기 때문에 여기에 민감할 수 있는 사업은 어려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파티장소나 펍, 양조장과 같이 소음이 문제가 안되는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건 굴다리를 이용하는 창의적 사업들이 주목을 받고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 그 주변의 연계가능한 지역 상권들도 덩달아 혜택을 보고 있다. 위의 지도에 나온 Bermonsey 지역의 철길거리는 주말이 되면 양조장에 술을 사거나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같이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음식과 기념품등을 파는 팝업스토어들이 같이 들어선다. 마치 한국의 먹자골목처럼, 모여있음으로 사람들을 더 쉽게 끌어모을 수 있게 된 것이고, 하나의 명소를 보러 온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 소비하는 다른 산업까지도 혜택을 보는 것이다.
마케팅이 발린 스토리텔링이 아닌,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은 술이 나올까?
한국에서도 인디문화나 트렌드를 이끄는 존재들은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 흔적들은 때로는 새로운 상권이 되기도 하고 어떠한 문화의 발상지가 되기도 한다. 과연 한국 크래프트 비어는 단순한 하나의 산업인지, 문화로 꽃 피울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비지니스 수완이나 인맥이 좋은 사람들이 기업이나 재력가에 거금을 투자받아 세우는 브루어리 말고 런던의 유쾌한 그들 처럼 술 만드는 것이 재미있어 달려드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양조장들이 한국에도 많아 질 수 있을까?
뭐든 억지로 하면 안되는 법, 그들이 시작 할 엄두를 낼 수 있는 기반을 국가나 단체가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 뒤에는 자연스레 어떠한 싹이 트이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양조장에서 생각치도 못한 술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